까다로운 의뢰인들

2025 명절 풍경

by 진저

설명절



명절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나에게 명절은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는 날이다. 그 말은 즉, 명절이 아니면 서로 안 본다는 거다. 자주 교류하는 친언니를 제외하고 나주혁신도시에 사는 부모님, 인천에 사는 여동생, 서울에 사는 남동생 식구를 ‘딱’ 일 년에 두 번, 설과 추석 때만 본다.


엎어지면 이마 닿을 곳에 사는데 왜 서로 안 보냐고 의아해하겠지만, 그게 우리 가족의 분위기다. ‘무소식이 희소식’. 사이는 좋지만, 서로의 일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용건이 있으면 보는 일도 드물게 있긴 한데, 그 용건은 이제 친척의 결혼식과 장례식 때다. 장례식의 비중이 점점 늘어간다..)


어떤 가족들은 명절 스트레스니 뭐니 하지만, 우리는 그저 같이 1박 2일 동안 시간을 보냈다가 또 두 계절이 지나서 다음 명절 때 무사히 만나기를 바라며 헤어지고, 각자 축구 후반전을 치르듯 시가나 처가로 향한다. 엄마가 만들어온 반찬 10여종과 구워 먹다가 남은 소고기를 잔뜩 싸들고…….


조카들이 생기면서는 명절 때 나는 평소 육아에 시달리는 가련한 영혼들을 위해서 조카들과 놀아주려고 노력한다. 이번 설에는, 다음 달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7살 이란성 쌍둥이 남매와 놀아주었다.


우리 집에 온 작은 악마쌍둥이 조카들은 내 책장에서 파버 카스텔 수채 색연필 세트를 찾아내고(이 애들은 보물 찾기에 꽤 소질이 있어 보인다, 지금 초등학교에서 그런 걸 하는지 모르겠지만.), 프린터의 A4 용지를 크리넥스 뽑듯 가져와서는 그림을 당장 그릴 것을 내게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둘의 성별이 달라서 꼬마숙녀는 ‘유니콘’을, 꼬마신사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요청했다.


유니콘은 날개가 멋있어야 하고, 털 색깔이 화려해야 하며, 배경에는 구름과 산이 있어야 했다. 다른 가족들은 다 거실에서 근황 토크로 화기애애할 때 나 홀로 외롭게 엎드려서 유니콘을 그렸고, 어린 의뢰인은 내게 보답으로 ‘쌍따봉’ 이 그려진 종이를 주었다.


첫 번째 그림의 대가 : 쌍따봉




쉬는 시간도 없이, 옵티머스 프라임을 세밀화로 그렸고, 두 번째 의뢰인은 첫 번째 의뢰인의 쌍따봉을 참고해서 ‘빛이 나는 쌍따봉’을 그려서 내게 주었다.


두 번째 그림의 대가: 빛나는 쌍따봉


그러자 다시 첫 번째 의뢰인이 찾아와서 이번엔 ‘불사조’를 그리라고 지시했다. 초기 노안 증상으로 눈이 침침해진 나는 더 이상은 힘들다며 거부했고, 그러자 의뢰인은 “이래도?” 하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번엔 선불로 ‘3따봉’에 ‘그림왕’ 칭호까지 내려주었다. 심혈을 기울인 불사조 그림에 고객은 흡족해했다.


세 번째 그림의 대가: 3따봉과 '그림그리기 왕', 그리고 작은 하트



그리고, 다음날 우리 가족은 세배를 했고, 떡국을 성인만큼 먹어치운 어린 두 의뢰인들은 또 씩 웃으면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이번엔 따봉만으론 안 되겠다면서 오만 원을 불렀고, 그들은 ‘그 정도쯤이야 껌값’ 하는 표정으로 세뱃돈으로 받은 노란 지폐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미소를 거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모, 큰 돈을 줬으니까 아주 잘 그려야 해.”


돈을 받으니 긴장이 됐다. 그들이 돈을 지불하고 의뢰한 그림은, ‘고객 불만족’ 사유로 환불 처리됐다.





아무래도, 이번 설명절에 나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얼굴을 마주한 듯 싶다.

돈이 곧 권력이다,라는.


몹시 까다로우신 두 의뢰인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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