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앞선, 금주 선언

2025년을 8일 앞둔 금주 결심

by 진저

목표: 금주


2025년을 8일 앞두고, 금주를 결심했다. 새해를 기점으로 매일 저녁 영어 공부를 하며, 이틀에 한 번은 숨이 찰 정도로 운동을 하고, 가급적 정크푸드를 멀리하는 멋지고 건강한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리라, 하는 다짐이야 해마다 늘 하지만, 이렇게 애매한 날짜에 ‘큰 결심’을 한 건 드문 일인데,


사건의 그날은 남편의 가족들과 외식을 하는 저녁 자리였다.

나는 어쩐지 그 집 고기가 유난히 질기다고 생각한 데다가 조만간 나올 책에서 비건과 채식주의에 대해서 썼던 지라 이렇게 여럿이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게 내심 켕겨 고기에 젓가락이 잘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날 자리의 주요 화제는 몇 주 전 갑자기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남겨준 유산과 후속 절차에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며느리인 내가 말을 섣불리 보태거나 가벼운 농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열띤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 채 애꿎은 콩나물 반찬에다 소주를 연거푸 마시기만 했다.


(사실상) 깡소주를 마신 결과, 나는 우리 집이 아닌 시가의 작은방에서 외출복 차림 그대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다. 기억이 완전히 삭제된 것처럼, 고깃집 이후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고깃집에서 나온 순간조차도. 평소 주량이 소주 1~2병인 걸 감안하면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 아마 셋이서 소주 네 병 정도 먹었던 것 같은데. 나는 간밤에 뭔 일이 있었는지 무서워서 차마 남편에게 물어보지 못했고, 며칠 뒤에 우리가 고깃집에서 나와 2차로 해산물집에 갔었고, 내가 가만히 있다가 구토를 하고, 맥락 없이 훌쩍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죄다 기억나는 척 (발)연기를 하고 있다가 '울었다'는 부분에서 깜짝 놀라서 나의 필름 삭제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하고야 말았다.


"아무 기억도 안 나!"


그리고 이어진 내 결연한 금주 선언에 어쩐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남편은 술이 취해도 그 사람의 인성이 나오는 것일 뿐이므로, 걱정하지 말아라, 자신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그 말은 배우자의 인성에 대한 호평이 아니라, 금주하지 말라는 악마의 유혹일 뿐이다. 무엇보다 나는 취한 내가 몹시 걱정인 사람이니까. 내가 그동안 술을 먹고 했던 짓들-이혼을 고민하는 친구에게 당장 이혼하라고 주제넘게 한 소리, 술김에 사귀어 버린 인간(들), 술 먹고 별 이유도 없이 거친 욕을 지껄였던 것, 술 먹고 길바닥에 넘어져 비싼 정장 바지에 구멍을 낸 기억들은 십수 년이 지나도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무수하게 찌질하고 부정적인 감정들과 쓰레기 같은 말들을 내 속에 담아둔 채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이 알코올을 틈타 봉인 해제되면 절대로 안 되는 것도.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한다.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내 책이 역주행해서, 내가 이름을 알리거나 공개석상에 나섰을 때 누군가가 만취했던 내 모습을 기억에서 끄집어내 그 이야기를 SNS에 올리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행인지! (역주행...그래도 해보고 싶다)


지금쯤 눈치챈 독자가 있겠지만, 내가 이렇게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2025년의 새해 목표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A4 1장 미만의 짧고 잡담 같은 일기를 쓰는 습관 들이기. 글에 힘을 빼고, 지병인 ‘내글구려’ 병에서 탈출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다음 주에 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새해목표가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해 주길.


P.S. 맥주는 술이 아니다. 아닐꺼야, 아니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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