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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Mar 19. 2019

특종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예전 영화를 다시 볼 때는 스토리보다 배우에 더 집중하게 된다. 특히 한국영화를 보면 지금은 주연만 하는 톱스타들이 그때에는 건달 3이나 친구 4 정도로 나오는 신들이 있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재능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더라도 차근차근 밟아서 올라왔구나 하는 생각에 배우의 등을 토닥토닥해주고 싶을 정도다. 대사 하나 없이 옆에 서 있을 때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귀엽다고 해주고 싶다. 그렇게 예전에 볼 때는 보지 않았던 그 젊은 단역 배우의 모습에 마음이 뺏기게 된다. 가끔은 혼자 리모컨을 쥐고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뭉클해지기까지 하다. 그것을 찍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수없는 오디션이 있었을까. 그 맘고생을 미루어 짐작해보게 된다. 그렇게 어떤 것들은 한참 지나고 되돌아봤을 때에야 찐한 추억으로 남는다.

     

도시의 소복한 눈을 아름답게 찍는 것은 보기보다 쉽지 않다. 인공눈을 살포할 수도 없는 뉴스는 더 그렇다. 눈은 보기에는 좋지만 기온이 올라가면 순식간에 녹고, 질퍽질퍽해져 길가 구정물이랑 섞이면 그것처럼 흉물스러운 골칫덩어리가 없다. 특히 첫눈은 기온이 그렇게 낮지 않을 때 내리기 때문에 금세 녹아버린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눈이 내린 지역을 촬영해 리포트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첫눈이 내렸다고 해서 아침 일찍 서둘러 갔지만 밤새 내린 눈은 이미 그쳐 있었다. 쌓인 것도 거의 녹고 차가 지나간 자리는 구정물로 변해갔다. 어쩌지. 인적이 드물어서 곱게 쌓인 첫눈을 찍어야 한다. 마음은 급해진다. 그럴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눈은 해가 중천에 가까워질수록 속절없이 녹으니까.


그때 내 눈에 한 초등학교가 들어왔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분교 같았다. 아직까지 학교 운동장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이거라도 찍을까 하고 교문을 들어서는데 한구석에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쉬는 시간인지, 등교하자마자 책가방을 교실에 던져놓고 바로 나온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뛰고 있었다. 아이들은 취재차량에서 내리는 우리들을 보더니 소리를 내고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방송국이다!”

병아리들은 아침에 엄마가 챙겨줬을 털 귀마개를 하나씩 하고 있었다. 벙어리장갑을 낀 아이도 있었지만 눈싸움을 하면서는 불편한 듯 하나둘씩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양 볼이 빨개진 아이들은 카메라를 향해 도토리 같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풀어 오른 볼에 손바닥을 대서 따뜻하게 덥혀주고 싶을 정도로 한없이 귀여웠다. 아이들은 카메라에 눈을 던지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물 들어간다고 기겁했을 카메라 기자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에 그저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와! 저희 테레비에 나와요?”

“나오지!”

“와! 근데 연예인이에요, 뭐예요?”

“응?”

(카메라 기자가 끼어들어) “그냥 이모야. 이모.”   

     

기자 생활을 돌아보면 단독 기사를 써서 기분이 날아갈 듯한 적도 있었지만 지나고 나면 그 기분은 며칠만 지나도 무뎌졌다. 하지만 볼 빨간 아이들과 함께한 이 짧은 시간을 생각하면 늘 웃음이 나고 가슴에 온기가 퍼진다.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야 알았다. 이 순간이 내 기자 생활에서 가장 빛나는 한때였음을.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대사 한 줄 없는 그 장면들이 전성기를 남몰래 예고하고 있듯이, 평범한 나의 인생에도 행복한 날이 올 거라고 알려주던 소중한 추억이란 걸 이제 와서야 알게 된다. 아이들이 첫눈에 기뻐하는 모습에 내 가슴에도 그제야 첫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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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이 포함된 에세이는 《오늘도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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