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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Dec 14. 2020

나는 족발을 들고 등교하기로 돼 있었다

타임캡슐에 얽힌 기억

그날 아침,

나는 돼지족발을 들고 오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어릴 적 지방의 한 교육대학에 딸린 초등학교에 다녔다. 선생님들은 실습 나온 이십대초반 교생들을 교실 뒤에 벌서듯 세워두고 신新교수법을 적용한 시범수업을 자주 했다. 각진 얼굴 느낌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한 선생님은 노래를 3배속으로 부르면 멜로디가 훨씬 잘 외워진다는 가설을 실험했다. 애꿎은 우리들은 그 일년 내내 노래를 래퍼처럼 허겁지겁 불러야 했다.    


내 기억에 육학년 일반 담임교사 J의 당시 교육 실험은 성적 향상법이었다. 매주 쪽지 시험을 보게 하고 그 일주일 성적에 따라 일등과 오십등, 이등과 사십구등, 삼등과 사십팔등… 이런 식으로 매주 짝꿍을 바꿨다. 그러다 일등과 꼴등끼리는 서로 다른 언어권 외국인끼리 앉혀 놓은 것처럼 뻘쭘할 뿐이란 걸 뒤늦게 깨닫고선 아차 싶었는지 세부 전략을 수정했다. 오십 명을 네 덩어리로 나눈 다음 일등과 십이등, 이등과 십일등, 삼등과 십등… 이런 식으로 근거리 등수끼리 짝을 맺어서 앉힌 것이다. 실제로 그 방법이 우리 안에 쿨쿨 자던 경쟁심을 흔들어 깨워서 유의미한 성적 향상으로 이어지게 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50÷4로 시작하는 그의 자리배치 공식은 졸업 때까지 내내 이어졌다. 문제는, 이 시기 나의 시험 점수가 교실 가장 안쪽 맨 앞, 그러니까 선생님 책상 코앞에 있는 일등 자리에 나를 종종 앉혔다는 거다. 내 십이년 학생 인생을 통틀어 두 번은 오지 않았던 성적 황금기였다.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빅 이벤트를 처음 계획했다. 그건 바로 ‘타임 캡슐 묻기’였다. 1990년대 후반이라는 세기말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타임 캡슐 행사는 곳곳에서 열풍이었다. 서울시는 타임캡슐을 묻어 400년 뒤에 열어보기로 했고, 검찰도 무언가 백주년을 기념하며 타임캡슐을 묻었다. 두산, 현대, 제일모직 등 대기업들도 앞다퉈 묻었다. 우리는 졸업생 모두 각자 꿈을 적게 하고 그걸 타임캡슐로 지칭되는 공룡알 모형 안에 넣어서 묻자는 거였다. 여기에 이십 년 뒤 졸업생들이 학교에 다시 모여 ‘드림스 컴 트루’가 됐는지 캡슐을 열어본다는 감동 서사까지 추가했다. 이 장기 이벤트의 설계자가 바로 담임 J였다.  


"엄마에게 말씀드려서 족발을 가져오너라."     


맨 앞자리에 앉은 나에게 한 말이었다. 타임 캡슐을 묻고 나서 복을 비는 고사를 지내야 한다는 거였다. 돼지머리 대신 약식으로 족발을 두고 절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 우리 아빠는 하루 일당으로 생활비를 벌었고, 엄마는 부업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방에 틀어박혀 기관총 같이 생긴 기계로 맹렬하게 흰 천에 자수 바늘을 찔러대고 있었다. 내성적인 아이가 웃자라기 최적의 환경이었다. 결국 나는 그 날 빈 손으로 등교했다.      

J는 일을 망쳤다며 아이들 앞에서 나를 노려봤다. 교무실에서 엄마에게 따로 항의 전화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 우리 반 모두는 색도화지 왼쪽에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를 써 넣고, 오른쪽엔 그 꿈이 이뤄지는 장면을 그렸다.         


이 낡은 기억을 지금까지 담고 있는 건 고사용 족발을 안 사가서 된통 혼이 난 것 때문이 아니다. 노기 어린 눈초리를 억울하게 받아내야 했기 때문도 아닌 것 같다. 이 때를 후회하는 건, 내가 그 와중에 타임캡슐 종이에 꿈을 선생님이라고 적어내서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 태어나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직업은 대통령, 판사, 검사, 의사, 과학자… 등등이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보니 내 주변에 실제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아빠의 직업은 자주 바뀌었던 것 같고, 그때마다 집안 분위기는 불안정했다. 주변에 나 이런 일 하는 사람입네 하면서 자랑스러워할만한 위인은 없었다. 한 줌이라도 권력이 있어 보이는 건, 그 시절 시골 여자아이의 눈에 그나마 선생님 뿐이었다. 족발을 사오지 않았다며 J의 언짢아하는 눈초리를 피해 몸이 움츠러들면서도 선생님이 장래희망이라고 또박또박 정성을 담아 적었던 그 세 글자가 마치 밀봉되듯 내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다.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의 사건들이 가장 확고하게 기억에 남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회상 효과Reminiscent effect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우리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들은 더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나중에 겪는 비슷한 일들은 머리에 잘 남지 않는다. 오랜 과거인데도 어린 시절 일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열 살 아이의 일 년과 구순 노인의 일 년은 같지 않다. 어른이 겪는 최근의 일들은 이미 전에 해본 것이기 때문에 기억이 단순하고 밋밋하지만, 어릴 때 처음 한 경험은 그 눈빛, 숨결까지 기억으로 남는다. 


나는 종종 이 회상 효과에 단단히 사로잡힌 채로 내 몸에 배인 절약, 이유없는 초조함, 야망 없음, 탐내지 않음, 자기 비하까지 이런 모든 가난의 냄새를 풍기는 것들이 어쩌면 이런 내 어린 시절 때문은 아닌지 생각한다. 앞으로 이 뿌리깊은 기억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각성이 필요한 것일까. 아득한 기분에 빠져든다.            

사람은 본질적으로는 회상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인생이란 건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세 가지가 있지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나고 봐야 알 수 있다. 셋 중 과거가 단연 힘이 세다. 종종 과거를 떠올리는 건 나만이 아닌 듯싶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마다 느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글에서 십 대 시절 이야기를 아주 길고 자세하게 묘사할 줄 안다는 것을. 반 세기가 넘는 그 동안에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을 텐데 어릴 적 어머니가 한 말, 아버지가 포옹할 때 품에서 나던 냄새, 뛰어놀던 골목길의 분위기, 가장 친했던 친구들까지. 육칠십 대가 다 되어서까지 그 기억에 대해서만큼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말하곤 한다.     

그렇게 누구든 자기 자신을 설명하다가 보면 반드시 어린 때의 시절과 형편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어쩌다 이런 내가 된 거지?’ 나란 사람의 형성 과정을 플래시백으로 생각하다 보면 인과 관계의 공식을 수도 없이 숙련공처럼 척척 만들어낸다. 나름 제 식대로 하나의 작은 사건을 끝내 잇고 또 이어서 어떤 결과로 반드시 연결시키고야 만다. 그렇게 하다 보면 진실이든 아니든 큰 상관은 없어진다. 


회상으로 시작된 과거를 타고 내려가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압축된 마음을 하나하나 펴 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종 긍정적이기도 하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서 벗어나서 ‘나는 나를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해져서 인터넷에서 그 학교 이름을 검색해 찾아보았다. 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 초등학교에서 지금까지도 타임 캡슐을 땅에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이상 고사를 지내지는 않겠지.

음…설마?   




****

새 책 원고를 쓰느라 그간 브런치에 글이 뜸했습니다.  

다시 아자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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