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정으로 살아요.
독일에 온 이유는 1. 연구 데이터 수집, 2. 특강이기 때문에 사실 여행이나 개인적인 일정, 즐거움은 모두 마지막으로 미루어 두었다. 여행에 진심인 나는 아마 여행을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면 아마도 일은 안 하고 여행 계획만 짜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그래서 일 외의 다른 새로운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에서 정을 느낀다는 건 계획대로 되거나, 예상을 할 수 있거나, 특별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느끼는 정과 그로 인한 기쁨은 언제나 예상치 않은 순간 찾아온다. 그것이 바로 낯선 곳에서의 삶이 주는 놀라움이다.
여러 가지 업무 일정 속에서 한 가지 미리 계획한 개인적인 일정이 있다면 Bonn 마라톤에서 하프 마라톤을 뛰는 것이었다. 하프 마라톤은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리 예약도 하고 어느 정도 숙소랑 일정들을 잡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마라톤이 일요일 아침 일찍 시작하기 때문에 전날 가서 미리 자야 할 것 같았고, 완주하고 난 후 샤워도 해야 하니 잘못하면 하프 마라톤 뛰자고 1박 2일+late check-out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같이 일하는 독일인 동료에서 나 옛 서독의 수도인 본에 가서 하프 마라톤 뛸 예정인데 너무 기대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 우리 형도 마침 본에 사는데 아마도 마라톤에 참가할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형을 소개해 줄 테니 그 집에 가서 자라고 주선도 해 주었다. 솔직히 조금 불편할까 걱정도 했지만 배낭여행 다니면서 남의 집에서 얻어 잘 수 있다면 절대 마다하지 않았던 내가 아닌가! 그렇게 얼굴 한 번 못 본 직장 동료의 형 집에서 일단 묵기로 하고 본으로 갔다. 개인적인 친분도 아닌지라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저녁까지 밖에서 먹은 후 다음 날 아침에 마라톤 전 먹을 간단한 에너지 바와 물을 사서 그 집으로 갔다. 기차역에서 집까지 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 다시는 상황이라서 기차역까지 차로 마중을 나와 주었고, 약간은 어색했지만 그래서 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갔다. 골목 끝, 가장 앞이 탁 트인 집에 살고 있었는데 집에 들어가니 가족들도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나에게 내어 준 방은 지금 캐나다로 유학 간 딸의 방. 그렇게 나는 처음 만난 동료의 가족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 날 같이 하프 마라톤을 완주한 후 (나보다 30분 일찍 완주하셨지만...) 샤워+점심 식사까지 얻어먹었다. 그 가족들과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오랜 시간 나누고 그 사이 정이 들어서 또 본에 오면 꼭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처음 본 나에게 너무나 따뜻하게 침대와 음식을 내어 주고, 무엇보다 그들의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어 준 그들... 이렇게 독일에서의 따뜻한 추억이 하나 쌓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연구에 참가할 실험 대상자를 구하기 위해서 근처 도시의 한국 학교들에 연락을 돌렸는데, 마침 내가 사는 도시의 한국 학교 교장님께서 흔쾌히 동의해 주셔서 실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담당 선생님과 업무로 메일을 통해 교류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점심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이 선생님들께선 거의 봉사의 마음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계셨고, 바쁘신 중 내가 와서 이것저것 묻고 실험 관련하여 여러 가지 확인을 한다고 귀찮게 해 드렸기 때문에 정말 죄송+감사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선생님께선 독일에서 외식은 가성비가 안 좋다며 나를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귀한 주말 저녁 시간에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해 주셨는데, 완전 진수성찬을 한식으로! 마련해 주신 것이었다. 음식도 물론 정말 맛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내어주신 시간,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그 노력이었다. 난 이방인이고 게다가 잠시 다녀가는 사람인데도 정성스레 음식, 시간, 에너지를 나누어 주시니 그 호의를 남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여행 다닐 때에는 사람들이 전해 준 정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 가치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저 공짜 숙소, 공짜 음식, 공짜 술, 공짜 교통수단에 '아싸, 운 좋다!'라는 것이 내가 느낀 전부였지만 시간이 흐른 후 보니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이다.
토요일 오후에 날씨가 너무 좋아서 계획보다 조깅이 길어졌다. 조깅을 마치고도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집 대신 시내 아이스크림 가게로 마지막 질주를 하였다. 시내 중심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엔 맛이 30가지도 넘는 아이스크림이 있고 그날도 역시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나도 기대에 부풀어 줄을 서서 한참 기다리다가 드디어 내 차례. 예쁘장한 점원에게 콘 하나를 주문하고 맛을 골랐다. 아이스크림을 퍼서 콘에 올리며 1.5유로라고 값을 말해 줬고 나는 카드로 결제하겠다고 했다. 그 점원은 당황하며 5유로 아래는 카드 결제가 안 된다면 현금만 받는다고 했다. 조깅을 나온 터라 현금은 없었고, 순간 1) 아이스크림을 포기한다 (하지만 아이스크림 이미 펐음), 2) 추가로 뭔가를 더 사서 5유로에 맞춘다 (하지만 앉을 자리는 없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너무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 점원은 '아, 현금 없으면 괜찮아요. 그냥 가져가세요. 제가 내는 거예요.'라는 것이다. 이런!!! 금액이 비싸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서 나도 '아, 그래도...'라고 말을 잃었다. 뒤에 줄 서 있는 손님도 많고 해서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음 날 돈을 가져다줄 요령으로 그 점원에게 혹시 일요일에도 일하는지 물었다. 그 점원은 계속 괜찮다며 돈 가져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공짜 아이스크림을 얻어 걸어오면서 먹는 기분은 아이스크림 맛보다 더 달콤했다. 이런 친절과 배려/이해를 경험하게 되면, 이 나이에도 그렇게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된다. 결국 일요일에 돈을 가져다줘야 한다는 핑계로 다시 같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사 먹고, 아이스크림 두 개 값과 팁을 살짝 얹어 주었다. 그 점원이 자기의 친절이 나 같은 이방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기를 바라며...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더라도 나 역시 외국에서 오래 살면서 유학생이나 새로 시작하는 직장인들을 보면 결코 남일같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들을 보면 내가 받았던 배려와 도움이 떠오르면서 나 역시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을 주고 싶어 진다. 지금 내가 명절엔 항상 음식을 나누고 또 집에 초대를 하고 하는 것이 사실은 결국 모두 20년 전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던 사람들의 유산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들이 정이 많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런 정을 한국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느껴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유럽에서, 중국에서, 지금 사는 싱가포르에서... 친절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특히 내가 약자일 때 받았던 배려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로 남기도 하여 내가 삶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내가 받았던 정과 배려가 돌고 돌아 나도 남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고, 또 그 사랑이 돌고 돌아 나의 아이들에게 닿겠지? 그렇게 보면 내 아이들이 세상에서 받을 배려를 내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그런 마음으로 조금은 더 친절하게 남을 대하려 한다. 친절이 난무하는 세상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