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J인 나는 여행에 관해서 만큼은 극 P로 돌변한다. 어쩌면 난 원래 무계획 인간인데 살아남기 위해서 철저히 계획적인 인간으로 변화한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지난 월요일 독일인 감독 빔 벤더스가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인 배우와 찍은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 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더랬다. 원래 인간의 사소한 이유로 기뻐하고 분노하는 종족이 아니던가? (오죽하면 소확행이라는 말도 있을까!) 영화 속의 장면을 거닐며 영화를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사색하는 상상으로도 난 너무 행복해졌다. 일주일 동안, 휴가를 확정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비행기표를 찾아 보았다. 마침 여권이 11월 만기라 새로 발급 신청한 여권만 나오면 바로 비행기표도 구입할 예정! 와, 되는대로 사는 게 어려운 게 아니구나. 그리고 되는대로 사는 것에서 얻는 행복이 절대 작지 않다는 걸 느꼈다. 심지어는 곧 학기가 시작이라 실제 여행을 학기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는 날, 11월에 출발하는데도 4개월 전의 난 이미 너무 행복하다. 아마도 이것이 어린왕자의 여우가 그를 기다리며 '3시부터 행복해진다는' 그 마음이 아닐까?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난 벌써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게 되겠지!
영화 리뷰들을 보면 [퍼펙트 데이즈]에서 일상의 소중함과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현재 처한 상태가 일상이건 여행 중이건 대단한 모험 중이건 상관없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순간의 의미를 끝없이 관찰하고 찾고 알아차려야 한다고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난 아무리 멋진 곳에서 여행 중이더라도 끝없이 불평하며 힘들어 하고 즐기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일상을 살아가고 있거나 어딘가로 훌쩍 떠났거나 변화를 꿈꾸거나 모든 곳과 시간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뭘 해도 행복을 찾긴 어렵지 않을까?
지난 달에 한국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싱가포르 살기 좋죠?' 내 대답은 한결같다. "한국이나 싱가포르나 다 같아요." 사실 크게 다른 것은 없다. 똑같이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서 일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뭘 어떻게 느끼는 지에 따라 다를 뿐. 결국은 되는대로 살아도 잘 알아차리면서 살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되는대로 살자.
--- 하지만 어쩌면 이런 성찰 역시 내 멋대로 살고 싶은 자유를 욕망하는 자의 핑계일 뿐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