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맛

by 마루금

선선한 바람이 부는 8월 말이다.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데 바로 한 달 전에 새집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가 처음으로 소유하는 집이 와이오밍에 있을 줄은 몰랐다. 94세 할머니가 1950년부터 살던 집. 이곳에서 자식을 길러냈고, 집을 내놓은 직후에 뉴욕에 사는 아들이 먼저 소풍을 떠나 노모와 70대의 딸은 장례식에 참석했기에 집을 파는 일이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영민한 남편 덕에 여러 행정적인 일들을 시간에 맞게 처리했고, 좋은 모기지매니저를 만나 참으로 순조롭게 모기지론을 받을 수 있었다. 짐을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았지만, 텍사스에서 이삿짐을 싣고 트럭을 타고 산 건너 물 건너 대륙을 남북으로 세로질러 왔던 일에 비하면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의 이사는 한결 가벼웠다. 마음만은.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할머니가 지난겨울부터 집을 비워둔 터라 뒷마당과 앞마당 잔디는 이미 누렇게 변했지만 아직 스프링클러는 돌리지 않았다. 곧 다가올 짧은 가을과 긴 겨울을 지난 후에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싶고, 뒤에는 낡고 비 새는 창고를 허물고 보다 견고한 건물을 지을 계획을 어렴풋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맛 가득한 토마토. 빨갛게 익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보송보송 애호박


















곳곳에 남은 할머니의 꽃밭이 다정하기는 하지만 각기 산재한 꽃밭의 구도가 공간의 효율성과는 상반되는지라 꽃밭을 통합하고, 텃밭을 만들고 닭장도 만들 계획이다. 아무래도 닭장은 닭들을 임시로 쉐드에 머물게 하면서 같이 지어나가야 할 것 같다. 여섯 마리의 닭 중에 이제 펭귄 혼자 살아남았다. 올해 오월에 네 살을 넘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우리 암탉. 텍사스에서 캐스퍼까지 긴 여정을 즐겁게 이겨내주길 바랄 뿐이다.


빛이 부족한 아파트에서 한 줌의 햇빛이라도 더 받으려고 옆으로 자라던 쪽파와 부추, 대파는 새집으로 온 후 3주 만에 위로 자라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의 90%는 지난겨울 텍사스에서 함께 왔다. 겨울을 이겨내고 이제야 허리를 펴고 자라는 이 수선화과 식물들에게 든든한 동지애를 느낀다. 화분 속 흙은 여름작물들이 자라기에는 그 토양이 너무 부족하다. 꽃만 잔뜩 핀 애호박 화분 다섯 개 중 이제야 손가락만큼 자란 애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내년 여름에는 텃밭에서 우리도 닭들도 실컷 먹을 채소가 실컷 자랐으면 좋겠다.

IMG_2998.jpeg 바람 부는 날의 파머스마켓은 손님이 없으면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팔을 뻗어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게 주 임무


파머스마켓에서 수제 물건들을 팔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네를 맞이하고, 새집을 쓸고 닦고 하다 보니 여름의 끝자락이다. 클리닉에 가는 길은 반으로 가까워졌는데, 새 학기를 맞이하느라 바쁜 사람들은 클리닉 찾기를 잊었는지 내 스케줄은 한산하기만 하다. 수입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내 통제를 벗어난 걱정은 접어두려고 한다. 여유시간이 생겼다고 여기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 둘 실행하면서 수입구조를 다변화하는 기회라 보는 게 마음이 편하다. 어둠 끝에 만나는 빛 한줄기가 소중한 법이니. 달짝지근하면서 씁쓸한 여름의 끝맛이 농후해져 깊은 맛으로 탄생하는 가을과 겨울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도 힘을 내본다.


IMG_3014.jpeg 집으로 오는 지름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익숙한 들풀과 약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