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게 맞을까
산다는 건 어쩌면 피상적으로 알던 단어들 하나 하나를 내 몸으로 직접 겪어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을 해봤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피상적으로 알았지만 직접 겪어냈던 단어는 '고생'이었다. 이 단어를 겪어내기 전까지는 성공한 사람들의 현재의 영광을 더 눈부시게 만들어주는 과거의 그림자나 밑거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게 고생이라고 생각했었다. 고생스러웠다고는 하지만 그 덕에 오늘의 영광이 있는거라면 고생이라는건 필요한 것이라 믿었다. 어른들도 다 말하지 않던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그리고 내 스스로 그 '고생'의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믿었던 그 때,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고 말한 사람들을 정말 저주했었다. '이렇게 힘든게 고생인데 고생을 하는게 좋다도 아니고 해야한다고 했다고? 이렇게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말이 어딨어?' 온 몸으로 그 단어를 겪어내던 때에 고작 두음절에 담긴 이 단어가 어떤 무게와 어떤 깊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제서야 알게 됐다.
그 이후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고생을 해야할 수 밖에 없었던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자기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했고, 고생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게 맞다고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생각이 또 바뀌었다.
한 시기 어떤 식으로든 고생을 해본 사람은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사람 때문에 지독하게 힘들어보고,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자신이 피상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순진했던 건지 뼈저리게 느끼며 마침내 자신이 살던 동화보다는 현실 세계에 발을 붙이게 됐다.
누군가는 고생의 시간이 자신의 지난 시간 어떤 과오에 따른 형벌이 아니었듯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다면 그 또한 자신의 공은 아닐거라고 겸손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고생이라는 단어를 체득하고 나서, 고생이라는 축으로 세상을 보게되고 고생해본 티가 안 나는 사람들에게는 괜한 시기, 질투를 하고 심술을 부리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고생이 너무나 처절했기에 다른 사람이 한 고생같은건 고생 축에도 못 낀다고 생각하는 고생 감별사가 되기도 했다.
사람마다 같은 고생을 하고도 얻어가는게 달랐다. 하지만 그 모두는 내 마음처럼 주물러지지 않는 삶에 대해 배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오늘을 살고 있다는 자각을 공통적으로 갖게된다. 그 자각 뒤에 찾아오는 감정은, 내 경우에는 치열하게 싸워 살아남은 나 자신에 대한 경외심 조금과 슬픔이었다.
내가 한창 힘들던 때 동네에서 오며가며 뵙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나를 볼 때마다 '조금만 더 버텨요! 좋은 날은 반드시 와요!' 라며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셨다. 그 힘들던 시기가 다 끝나고 다시 찾은 그 동네에서 우연히 그 분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그분이 나에게 그러시더라.
'얼굴이 참 많이 좋아졌네요. 고생할 때는 정말 너무 너무 힘든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 고생이라는 것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그 시간이 선물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거예요.'
그 말을 듣던 때에는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그거야 심성이 고우시고, 신앙심도 깊으신 아주머니 이야기가 아닐까?' 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고생 끝에 무엇이 찾아왔었는지'를 생각하는 나를 보며 앞으로 살면서 고생에 대한 나의 해석도 시간과 함께 변해갈 가능성이 있음을, 그래서 언젠가는 아주머니의 생각에 동의하는 때가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나를 스쳤다. 그렇다면 고생 끝에는 고생했던 시간이 선물이었다는 해석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건데, 과연 그런 날이 내게 올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