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간 고생과 한몸이 되어 구르던 시절을 벗어난 후 내게 찾아온 감정은 뿌듯함이나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인생에 호되게 당하고나서의 겸손함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한것인지, 나는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생각이 꼬리를 물던 어느 날, 이 동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동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한 소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코너를 돌았는데 한 남자가 소녀에게 2장의 티켓을 내민다. 남자는 하나는 꽃나라행 여행 티켓이고, 다른 하나는 별나라행 여행 티켓이라고 한다. 남자는 별나라 여행은 '모 아니면 도'라고 소녀에게 일러준다. 가는 길에 우주선이 폭파될 가능성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소녀의 눈에 선택은 뻔해보였다. 소녀는 꽃나라행 티켓을 택했고, 새로운 모험에 소녀는 마음이 한껏 들떴다.
사진: Unsplash의Özcan ADIYAMAN
꽃나라에 도착한 소녀는 한참을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두 발이 다 헤지고, 피투성이로 걷고 또 걸으면서도 분명 이 끝이 있을것이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곳을 같이 걷던 사람들이 말했다.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게 다 꽃나라행 티켓을 고른 탓이라고. 소녀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자신의 선택의 책임을 오롯이 본인이 지려고 하였다. 별나라행 티켓을 택했으면 지금쯤 어느 다른 별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을까 싶다가도 그 선택의 진실은 알 수 없으니 '만약 별나라행 티켓을 골랐다면 꼼짝없이 지구로 돌아오지 못했을거야!' 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리고 앞으로 무언가를 다시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때는 좀 더 신중을 기하자고 다짐했다.
가시밭길을 걷고 걷다 지칠대로 지친 소녀는 순진했던 자신의 다짐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다 내 탓일까? 이게 전부 내가 꽃나라행 티켓을 골랐기 때문일까?' 그러다 더 이상 한 발도 내딛을 수 없을 때 그 남자를 저주하며 생각했다.
'그 남자는 왜 갑자기 튀어나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나에게 선택을 강요한걸까? 왜 선택지는 꽃나라 아니면 별나라 뿐이었을까?'
동화는 여기서 끝난다.
나는 소녀에게 티켓을 건넸던 이 남자를 인생이라 부른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하게 하고, 그 긴 책임을 우리에게 지우는 것. 그게 우리가 사는 인생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우리가 하는 선택의 맹점은 우리가 선택하는 시점도, 선택지의 범위도 우리가 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거기다 선택의 결과도 나의 노력보다는 운에 맡겨야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인생이 보여주는 선택지 안에서 그 당시의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다. 그러니까 선택은 100% 내 몫이 아니었는데, 책임은 100%, 오롯이 내 몫인거다.
2020년 연말 뉴질랜드 타우랑가 바닷가에서 혼자 커피 한잔 하며, 내가 지나왔던 시간을 돌이켜보다 이 동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소녀에게 티켓을 건넸던 그 남자는 소녀가 꽃나라로 향할 때 그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소녀를 걱정하는 얼굴이었을까, 비웃는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무표정이었을까?'
누군가는 그 남자를 인생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신이라 할 수도 있고, 기회라 칭할 수도 있고, 운명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인생이라 부른다. 당시 인생은 나에게 어떤 의도로 찾아와, 나로 하여 불완전한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인지, 왜 나를 시험에 들게 했던 것인지에 대해 나는 내내 궁금해했다.
그러다 요즘은 이렇게 생각한다. 인생이 내게 선택지를 보여주고, 내가 선택하고, 책임을 지고, 인내하며 신을 원망하던 그 모든 시간은 인생이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했던 시간이었다고. 그 무언가란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신당할 수 있다는 사실, 오롯이 느껴본 책임의 무게, 한번의 선택은 때론 긴 책임을 불러온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