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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Apr 07. 2023

순진하다는 말이 왜 그렇게 싫을까

다른 의도라는게 뭔지 몰라서

그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들었을 때 기분이 언짢아 지는 말이 있는데, 내게는 그 중 하나가 ‘너 좀 순진하잖아.’ 이다. 이와 비슷하게 ‘어휴, 내가 너 정말 걱정된다.’ 뭐 이런것도 있다. 이 말 듣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나는 이런 말을 종종 듣고 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 여대생이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모델처럼 잘 생긴 남자가 그 여자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단다. 그 일을 계기로 둘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연애를 하는 동안 남자는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지를 밝히지도 않고 가끔 연락이 안되기도 했단다. 그러다 하루는 여자가 또 다시 연락 두절된 남자를 추궁 했더니, 남자는 자신은 사실 국정원 비밀요원이고 일본과 한국을 자주 오가기 때문에 일본에 있을 때는 연락이 안되는거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분이 절대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말도 덧붙였단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는 작전 중 부상으로 급하게 수술을 해야한다는 명목하에 여자에게 큰 돈을 빌려가고 잠적을 했다는 결론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졌다. 지금이야 실화탐사대 같은 것만 봐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게 당시 그 이야기는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근데 나와 같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거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맨디는 이런식으로 당할 수 있어.’

 ‘얘는 좀 순진해서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순진하다는 말이 싫어진게.     


사진: Unsplash의Vince Fleming




친구 꾸꾸에게 ‘예전에 네가 좀 순진했었지.’ 이 말을 최근에 듣는데 나도 모르게, '뭐야,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던거야?’ 라고 해버렸다. 그래도 지금은 덜 순진한 것 같다고 하니까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동안 생각해보게 되었다. 도대체 순진하다는 건 뭔지,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싫은건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내가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다고 말 할 수 있게 된건지.


순진함이 뭔가를 생각해보다 생각이 났던 한 일화가 있다. 초등학교 4학때 담임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학교 아이들이 수련회를 갔는데 한 아이가 자는 동안 친구들이 그 아이 얼굴에 낙서를 했단다. 그 아이는 다음 날이 되고, 또 그 다음날이 되도 영영 깨어나지 못했단다. 왜냐면 자는 동안 이 아이의 영혼이 몸 밖을 빠져나가 있다가 낙서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몸이라고 인식하지 못해 결국 그 영혼이 몸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에 반 친구들끼리 '정말 영혼이라는게 있긴 한건가보다.', '절대 그런 장난 치면 안되겠다!' 그런 다짐을 서로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를 생각하다 그랬다. 순진함이란 타인이 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의 의도가 따로 있을 수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닐까.


사진: Unsplash의Noah Buscher


선생님의 의도는 아이들이 장난을 치지 않게 함으로써 관리를 좀 더 수월하게 하는데 있었고, 그걸 무서운 이야기로 포장하여 공포심을 심어주신건데, 순진했던 그때의 우리반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은 거다. 우산을 들고 있는데 우산 속으로 들어온 잘생긴 남자가 나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대화를 할수록 우리는 운명이라는 느낌이 든단다. 순진함이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이 남자의 의도가 따로 있을 수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


의도가 따로 있다는 걸 왜 간파하지 못하냐면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은 본인이 불순한 의도같은 걸 품어본 적이 없어서 타인도 똑같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의도' 라는 것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바로 이 포인트 때문에 나는 순진하다는 얘기를 듣는 걸 싫어한다. 가능하면 똑똑하게 살고 싶은데, 누군가로부터 어리숙하다는 평가를 들으면 관계에서도 왠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기분이 드니까.




지금의 나는 친구 꾸꾸로부터 아주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덜 순진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뭐 그게 마냥 칭찬도 아니지만 순진해 빠졌다는 이야기보다는 이게 낫다고 혼자 생각한다. '무엇이 날 이렇게 변화시킨 걸까?' 꾸꾸에게 물어봤더니 '네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만났던 끔찍했던 사람들 덕분인 것 같다.' 고 했다. 그 사람들을 보고 겪으며 마냥 사람들이 선하지 않다는 것과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주 쉽게 바뀔 수 있는게 말과 행동이라는 걸 배우면서, 그리고 그 속에서 나 역시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며, 그렇게 순진함을 조금씩 벗어냈다.


이제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도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눈 감아주는 정도까지는 온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이것도 모를 일이다.


근데 좀 그렇지 않나? 더 이상 우리가 순진하지 않은게 조금은 슬픈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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