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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네 Choi Feb 01. 2023

프로포즈, 그 이상과 현실 사이

계획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이번 편은 미국과 한국 사이 롱디 연애를 하면서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확신을 더해 준 프로포즈 이야기입니다.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미국 박사 공부가 기약이 없는 과정인지라 연애도 결혼도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얘기를 시작하려니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누구에게나 근사한 계획이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박사과정 1년 차를 무사히 마치고 한국에 방문한 저에게는 근사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여자친구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런 프로포즈를 할 계획이요. 당시 사귄 지 벌써 3년이 된 때이고, 이미 결혼을 얘기하고 유학길에 올랐던 상황이라 결혼 제안 자체가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습니다. 감수성 풍부하고 섬세한 차도녀인 여자친구에게 중요한 것은 프로포즈를 '어떻게' 하느냐였습니다. 풍선에, 촛불에, 큰 곰 인형 이런 것 말고, 영화 <러브 액츄얼리> 느낌의 담백 달달한 프로포즈를 받고 싶다는 여자친구로부터 이미 지난 1년 간 세뇌를 당한 상태였습니다. 누구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여자친구는 어떤 연예인의 프로포즈 이야기가 정말 로맨틱하다며 제게 두어 번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연예인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조수석에 앉은 여자친구에게 앞에 있는 글로브박스에서 선글라스인가 뭔가를 꺼내달라고 무심하게 말했는데 알고 보니 거기 결혼반지가 있어서 여자친구가 감동했다는 뭐 그런 스토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제 여자친구의 마음을 설레게 한 그 연예인에게 질투가 났죠.


"흥, 겨우 그 정도? 내가 훨씬 더 멋있게 해 줄게!"

"됐어, 그런 걸 멋있게 하려고 하지 마. 촌스러워지니까. 난 그렇게 잔잔하게 하는 게 진짜 센스 있고 감동적인 것 같어."


제 프로포즈의 결과는요? 음... 단답형으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 과정을 먼저 이야기해야겠군요.


# 상황 version 1:  머릿속 시뮬레이션

제 계획은 이랬습니다. 여자친구가 나중에 꼭 선물 받고 싶다고 했던 민트색 박스의 T사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제 형편에 그 깨알만 한 다이아 목걸이는 조금 부담이 되긴 했지만, 학교에서 나오는 생활비를 조금씩 모아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친구는 제가 그해 여름에 미국에서 들어올 때 그 목걸이를 사 왔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지요. 사귀기 전 여자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자친구의 사진을 놓고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그 초상화를 이번에 다시 돌려 달라고 한 뒤, 초상화 위에 프로포즈할 때 선물할 목걸이를 그려 넣어서 진짜 목걸이와 함께 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멋진 아이디어에서 그쳤어야 했는데, 그 연예인 생각이 나는 바람에 그만... 좀 더 욕심을 내 보기로 했습니다.


<여자친구> -마네 Choi, 2008


더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서는 서프라이즈라는 요소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저는 치밀하게 장면을 구상해 봤습니다. 인적이 뜸한 월요일 오전, 동네 작은 미술관. 두 남녀가 무심히 걸으며 작품을 하나씩 감상합니다. 다음 작품으로 걸음을 뗀 순간, 벽에 걸린 낯익은 그림을 본 여자는 놀라게 됩니다.


"이 그림이 왜 여기에…자기가 그린 거잖아?"


남자에게 눈을 돌린 여자는 이내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민트색 박스를 발견합니다. 곧 그 박스가 스르르 열리고 꿈에 그리던 T사 목걸이가 나타납니다. 그 반짝임이 여자의 놀란 눈가에 맺힌 물기를 더 영롱하게 밝히는 순간, 미술관의 시간이 멈춥니다.


또각.

남자가 한 발짝 다가가 여자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며 덤덤하게 얘기합니다.


"OO씨, 우리가 평생 함께 꿈꾸고 그걸 같이 이루어 나가면 좋겠어. 지금 당장은 아닐 수 있지만, 그리고 전부는 아니겠지만, 언젠가 우리가 꿈꾸는 일들 중에 몇 가지는 정말로 이루어지는 그런 기적들도 일어나겠지? 그 순간들을 OO씨와 함께 하고 싶어. 저 그림 속 목걸이가 여기 OO씨 목에 정말로 걸리는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야."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조승우의 노랫소리가 미술관을 가득 메우며 장면은 서서히 어두워집니다.



# 상황 version 2:  머리 밖으로 나간 아이디어가 맞이한 현실

'됐어, 이거야!'

머릿속으로 떠올린 장면에 너무나 흡족해하며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를 했습니다. 때마침 예술의 전당에서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시회를 연다고 하니, 이 모든 계획은 하늘도 도와주는 완벽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언제까지? 처맞기 전까지... 저와 여자친구 둘 다 미술 작품을 잘 모르지만 보는 것은 좋아합니다. 저는 예술의 전당 전시회장 도면을 살피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자친구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재빨리 달려가 2전시실 구석에 그림을 놓아두고 오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예술의 전당 전시관 1층 평면도>


이제 실전입니다.

예술의 전당 오르세 미술관 전시회 티켓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OO야, 내일 예술의 전당 가자. 우리가 좋아하는 고흐 작품도 있대. 옷 예쁘게 입고 와야 돼."

"그래, 내일 봐!(모야모야, 드디어 프로포즈하려고 그러나? 너무 티 나는데?)"


 학생인 제가 평소에 입을 일이 없던 단 한 벌뿐인 검은색 양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중요한 날이니까요. 옷 선택에서부터 이미 잘못되었지만 센스 없는 저는 그 망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안 하던 걸 하면 탈이 나는 법이죠. 지하철 타기 전에 프로포즈용 장미 꽃다발을 사기 위해 꽃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꽃집에 있어야 할 빨간 장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계획 차질 발생). 그날따라 빨간 장미가 없고 노란 장미꽃만 있더군요. 참고로 여자친구는 노란색 장미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꽃집 아저씨가 오늘은 노란 꽃이 더 예쁘다며 서비스로 금 반짝이를 마구 뿌려주셨습니다(계획에 아주 살짝 차질 생김). 까만 양복 차림에, 한 손에는 얼떨결에 산 노란 장미꽃,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여자친구의 초상화를 담은 훈민정음이 적힌 교보문고 종이백을 들었습니다. 왜 종이백에 담았냐고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건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끝이 해진 종이백을 고른 겁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흔들리는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날 제 계획 역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재지 못한 채로요.


드디어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친구가 예쁜 옷을 입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이날 유일하게 계획대로 된 일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정장을 입고 왔네? 오늘 면접 있으세요?"

"으응, 이런 데 올 때는 갖춰 입어야지. 예의상."

"꽃다발? 어머, 이 반짝이 가루 다 떨어지네 옷에 다 묻고!"


'어라, 이게 아닌데...' 일단 핵심 이벤트를 하는 게 중요하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아직까지는 통제 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쪽 손에 든 건 뭐야?"

"아, 별거 아니야. 책 보던 거 하나 가져왔어. 들어가자.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자기도 다녀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위기를 간신히 넘겼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는 여자친구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분 남짓. 잰걸음으로 건물 모퉁이에 있는 전시관 직원에게 다가가 아주 빠르게 저의 상황 설명을 했습니다.


"저실례지만제가이그림액자로여자친구한테프로포즈하려고하는데이액자를저기구석에잠깐만둘수있을까요아주잠깐이면됩니다." 헉, 헉.

"...(이건 또 무슨 돌+아이지?) 죄송합니다 손님. 규정상 외부 물건을 전시 작품 근처에 둘 수 없습니다."(계획에서 매우 크게 벗어남)


제가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무려 예술의 전당인데 말이죠. 예술의 전당 전시관에 가본 건 처음이라 전시관 규모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습니다. 단호한 직원의 설명에, 더 이상 이걸 해달라고 시간을 끌면서 떼쓸 수도 없고, 일단 다시 여자친구에게 돌아갔습니다. <러브 액츄얼리>나 <엽기적인 그녀> 같이 놀이공원 전체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미술관 명작 그림 옆 바닥에 제 그림 하나 잠깐 놓는 것 정도는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한 나이 스물일곱 먹은 박사과정생 제 계획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물정 잘 모르는 제 곁에 있어주는 아내에게 참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결국, 그 넓은 전시관을 다 도는 동안 제가 상상했던 그 장면은 연출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릎에 자꾸 스쳐서 이제는 아예 모서리 한쪽이 찢어진 교보문고 종이백이 제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고 있었습니다.


#  보너스 상황

프로포즈를 하지 못한 저는 여자친구와 일찍 저녁을 먹고 헤어졌습니다. 여자친구는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집으로 돌아갔죠. 혜화역 집으로 돌아오니 형이 묻습니다.


"프로포즈 잘했나?"

"아니, 때를 놓쳤어. 진돗개 하나 발령(심각한 상황)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바로 알아본 형이 말했습니다.


"그래? 이따가 차 필요하면 써."


다시 시도해 보라는 신의 계시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통화하면서 들어보니 역시나 여자친구는 제가 프로포즈하려 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가 기대하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아무런 근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고, 받아온 거라곤 노란 장미 꽃다발뿐이니 기대가 컸던 만큼 속상했을 겁니다. 그날 입은 양복부터 시작해서 양재역에서 전시회 보고 저녁을 먹기 위해 용산까지 이동한 그 창의적인 동선과, 어중간한 오후 4시에 저녁을 먹은 것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정말 민망하네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오후 4시에 먹는 밥을 저녁이라고 부르기는 양심상 허락이 안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센스는 없지만 의지가 강한 사람이거든요. 저녁 늦게 여자친구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했습니다.


이번에는 지하철이 아닌 형 차를 운전해서 여자친구와 함께 남산에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갔습니다. 생전 처음 가보는 그런 멋진 곳이었어요.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 두 개를 주문했습니다.


"아까부터 다 티 났어. 그걸 왜 들고 온 거야?"

"응, 이거?"


낮에 썼던 종이백은 찢어졌기도 했고, 아픈 기억이 있어서 다른 멀쩡한 쇼핑백으로 바꿔서 왔습니다. 여자친구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 이때다 싶어 그림 액자를 꺼냈습니다.


"보여주려고 그랬지. 그림에 뭐 달라진 거 없어?"

"이거 목걸이 그려 넣은 거?"


조용히 대답하는 여자친구에게 준비해 둔 멘트를 했습니다.


"OO야, 우리가 평생 함께 꿈꾸고 그걸 같이 하나씩 이루어 나가면 좋겠어. 지금 당장은 아닐 수 있지만, 그리고 전부는 아니겠지만, 언젠가 우리가 꿈꾸는 일들 중에 몇 가지는 정말로 이루어지는 그런 기적들도 일어나겠지? 그 순간들을 함께 하고 싶어."


그리고 나서 주머니에서 민트색 작은 상자를 꺼내 열어 보였습니다.


"이 그림 속 목걸이가 진짜로 목에 걸리는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야. 이게 그 시작이야. 우리 이렇게 하나씩 이뤄 나가자."

"......"


그렇게 여자친구는 감동의 눈물과 하루종일 마음고생 한 것에 대한 설움의 눈물을 흘리며 장장 11시간에 걸친 프로포즈를 받는 데 성공합니다.


# 계획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

감동적인 프로포즈를 하겠다는 계획은 현실에 얻어맞아 보기 좋게 고꾸라졌지만, 여자친구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런 프로포즈를 하겠다는 당초 계획은 어쨌거나 성공이었습니다. 11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이렇게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면요. 계획이 치밀하든 허술하든, 인생은 이를 비웃듯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여기저기 풀어놓습니다. 타이슨의 명언이 괜히 명언이 된 게 아니겠죠. 당장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주눅 들 필요는 없습니다. 연애가 됐든 진로 계획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마음이 남아있다면, 언젠가 또 다른 상황에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이뤄낼 기회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포즈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날 마지막 시도까지 잘 되지 않았다면 아마 또 다른 방식의 프로포즈를 계획했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 그 방법까진 정말 쓰고 싶지 않지만 그 연예인이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했을 수도 있겠고요.


사실,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프로포즈를 했다면 당사자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더군요. 섭섭한 것은 섭섭한 대로, 감동적인 것은 감동한 그대로, 그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이 경험 자체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니까요. 결국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자명한 이치를 또 한 번 가슴에 새겨 봅니다. 그러니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계획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종이 한 장만큼의 간극은 그러려니 하며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진실된 마음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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