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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짬뽕 뮬란 Dec 04. 2022

전부가 내 탓

비난하다

   

초등학교 때는 말 수가 없었고 늘 우울한 표정을 하는 어두운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처음 왕따를 당했다. 말 못하는 부모의 자식이라며 친구들은 내게 손가락질했다. 친구들은 날 벙어리나 병신으로 불렀다. 그런 말을 들을수록 내 입은 더욱 굳게 잠겼다. 학교에 가는 것이 괴로워 잠들기 전 매일 밤 기도를 했다. ‘내일의 해가 뜨지 않게 해주세요.’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 내 책상에 장난을 쳐놓곤 했었다. 의자를 숨겨둔다든지 내 책상에 물을 뿌려 놓는다든지 책상 서랍에 벌레를 넣어둔다든지의 행동들이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고 내 가방을 숨겨 놓거나 내 등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찢어놓기도 했고 내가 훔친 물건이 아니었는데도 친구들은 나를 도둑으로 몰기도 했다. 


그럼에도 희망이 아예 없진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나와 짝꿍이었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반장이었다. 그나마 내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유일하게 나를 감싸준 친구였다. 전학을 가고나서는 연락이 끊겼지만 지금도 한 번씩 그 친구가 생각이 날 정도로 고마운 친구로 기억에 남는다. 한 날은 친구들이 내게 와서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며 괴롭혔다. 그때 내 짝이었던 반장은 그 친구들을 쫓아내주기도 했었다. 온종일 머리채를 잡혔으니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날 집으로 가자마자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나 머리 자르고 싶어요.’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싫어했다. 그냥 내 잘못이라 생각했다. 모든 게 내 탓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가 싫었다. 친구들도 나를 싫어했지만 나도 나를 싫어했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나를 싫어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도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데 누가 나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는 머리를 직접 잘라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친구들에게 또 놀림 받는 머리가 될까 걱정했다. 아홉 살이었던 나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 자르는 돈도 아끼고 싶으셨던 할머니를 이해해야 했다. 할머니는 어색한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내게 왜 머리가 자르고 싶은지를 물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내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쳐서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가 걱정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 응석을 부릴 걸 그랬다. 친구들이 우리집은 가난해서 거지라고 놀리고 지금의 부모님을 만나서 벙어리라며 나를 괴롭힌다고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할머니에게라도 응석을 부렸어야 했다. 나는 숨겼다. 말을 해도 할머니의 걱정만 늘지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나이 차이가 조금은 덜 나는 작은 언니한테 말한 적은 있었다. 그때 언니는 말했다. ‘니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 말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또 그 말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나는 내가 싫었다. 부모의 가난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장애가 내 탓이었다. 태어난 내가 내 탓이었고 살아 있는 내가 내 탓이었다. 그때의 그 말이 지금도 내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있다. 한 번씩 그 말이 스멀스멀 올라와 어렸던 나 자신을 괴롭혔다. 나는 내가 싫다.     


우울증에 빠지면 무슨 일이 생겨도 늘 나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니 나는 미움 받아야 하는 아이인가보다 생각했던 적이 있다. 

중학교 때 나는 정신적으로 느꼈던 이상한 생각들이 행동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에게 매일 불려가 구타를 당해야 했다. 나는 이런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배들이 나를 부르는 건 내 탓이었다. 선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학교 폭력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열 네 살이었다. 당연한 줄 알았다. 무언가 잘못됐음에도 그냥 내 탓이었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돼서 집에 돌아가면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넘어지고 체육시간에 다치고 친구와 장난을 치다 다친 것으로 둘러대기만 했다. 할머니가 믿으셨을 거라 생각한다. 학교 폭력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셨으리라. 


나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잘못이라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는 선배들이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친구들끼리 없는 돈을 모아 선배들에게 상납해야 했지만 매일 불어나는 금액에 우리는 감당이 안되기 시작했다. 상납하지 못하는 날은 죽도록 맞아야 했다. 결국 나는 할머니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감아주었다. 할머니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배들에게 똑같이 상납을 받기 시작했다. 그 돈을 모으고 모아 3학년 선배들에게 돈을 줬다. 나중에는 학교 선생님들 귀에 들어가게 됐는데 결국에 잘못은 가운데 끼어있던 2학년인 나와 친구들이었다. 추후에 당할 복수가 두려워 선배들이 시켜서 그런 거라고 말하진 못했다. 


당시 사귀던 오빠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목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막힌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위로가 필요했었던 걸까. 관심이 필요했었던 걸까. 누군가 보듬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걸까. 길을 잃은 고양이처럼 누군가 관심을 가져준 말 한마디에 쏟아지듯 눈물을 끄집어냈다. 처음 받아보는 손길은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두렵고 무섭기도 했다. ‘내 잘못이 맞는데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사람이다. 고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선배였지만 나를 진심으로 위해준 사람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는 반항이 심했던 내 사춘기도 조금은 가라앉는 듯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공부를 했다. 물론 주변 친구들은 여전했다. 사고를 치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반항이 심했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무리에서도 공부하려고 노력했고 친구들이 괴롭히는 아이를 뒤에서 보듬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안정적으로 변해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탓을 하는 것만큼은 쉽게 변하지 않더라. 


내 작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전부가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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