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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가 속한 대륙을 떠나는 날이다. 아시아, 동아시아만 머물던 내가 드디어 머나먼 유럽의 땅을 밟는 역시적인 순간이었다. 처음 유럽여행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에서 멈춰버린 내 꿈의 시계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작 10년 동안 1초의 초침도 움직이지 않은 고장 난 시계는 인천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쉼 없이 움직였다.
[BRITISH AIRWAYS]
PARK MINJI, Seoul >>>> London
런던행 비행기 티켓. 이 항공권을 끊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간직해온 로망을 펼쳐낼 배낭여행의 시작점인 곳이었다. 인천공항 게이트에 오르면 나는 한참(이라고 생각하지만 짧은 69일)의 시간이 지나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누누이 말했지만 머리털 자라고 가장 멀리 가는 여행이고 걸음마를 시작한 이래로 최대로 오래 부모님 품을 떠나는 여행이 이었다. 물론, 동생이란 혹이 내 옆에 붙어있지만.
웅성이는 공항소음 사이로,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표시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공항 안내판을 가로질러 나를 미지의 세계로 데려다 줄 39번 게이트 앞에 섰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인 지,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짐들이 늘어선 줄인지 모호한 긴 기다림이 내 발 끝을 따라 비행기까지 이어졌다.
처음 런던으로 입국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동생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입국심사는 동생만의 걱정은 아니었다. 나름 영어회화를 익히겠다고 인터넷으로 회화 공부를 하던 나도 '영국의 입국심사'는 꽤 긴장이 되었다. 40일 정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난 뒤 남은 시간은 천천히 포르투갈과 스페인 남부 도시를 여행할 계획이 있던 우리는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국내에서 유명한 유럽여행 커뮤니티에 가입을 했다. 그리고 아주 예전 게시글부터 최신 게시글까지 정보라면 시기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정보의 바다를 유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괴담과도 같은 정보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국의 입국심사가 꽤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런던의 입국심사는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동생은 영국 땅을 밟기도 전에 혼자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부터 시작해서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을 A부터 Z까지 상상에 나래를 펼쳤더랬다.
그런 상상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매는 아주 안전히, 별 일 없이 히스로 공항에 발을 디뎠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 닥친 상황들을 해결하기 바빴다. 하루 이틀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준비한 유럽용 핸드폰 유심으로 갈아 끼우고, 기껏 공부한 영어가 무색하게 더듬더듬 단어만 말하며 영국 입국심사관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 천천히 토해지는 여행 캐리어들 사이에 숨어있는 배낭을 찾고 나서야 비로소 입국을 완료할 수 있었다.
카톡-
핸드폰을 켜고 데이터를 연결하자마자 제일 먼저 온 연락은 바로 엄마였다. 이 세상에 단 셋뿐인 자식새끼 중 두 명이나 머나먼 타지로 보낸 엄마는 혹여나 자식들이 탄 비행기가 사고가 날까 노심초사하며 영국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을 하라는 연락을 남기셨다.
[나: 엄마~! 나 이제 비행기 탄다! 이제 13시간?? 정도 연락 못 해 ~!]
[엄마: 그래 잘 다녀오고, 도착하면 연락해]
[나: 이제 도착했어! 나 이제 영국임 � 지금 런던 공항이야]
[나: 교통카드 충전해서 숙소 가려고! 숙소는 (링크) 요기, 6명이서 같이 자는 거야~!]
한국시간으로 해를 넘기고서 하루가 지나 한 연락이었다. 한국시간으로 새벽이었나 한밤이었나, 엄마의 연락은 기대하지 않은 채 일단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엄마는 연락을 보내기가 무섭게 바로 읽고 답장이 왔다.
[엄마: 조심하고, 우리 딸들 너무 멋있어]
엄마의 멋있는 딸들은 영국공항 화장실에서 낑낑대며 옷을 벗으며 복대를 하기 바빴다. 혹시 모를 소매치기가 스쳐 지나가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산 옷 안에 입는 크로스(목걸이) 형 복대를 찬 우리들은 최소한의 현금만을 손에 쥔 채 당당하게 교통카드 발급기 앞에 섰다.
<퀘스트 : 런던에 잡은 숙소로 이동하시오 (1)>
지금 런던에 입국한 당신, 런던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를 발급하여 숙소로 이동하시오.
(단, 택시 이동 불가 / 제한시간 : 당신의 체력이 허락하는 한)
▶︎ YES ▶︎ 수락
당당하게 섰지만 손안에 있는 핸드폰으로 연신 교통카드 발급하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다. 두 달간의 짐을 어깨에 이고 선 우리는 한 명은 오이스터 카드 발급하는 법을 찾아보고, 한 명은 옆에서 오이스터 카드를 구매하는 사람들을 훔쳐보기 바빴다. 사진으로 잘 정리된 블로그의 글을 따라 오이스터 카드를 발급하는 것으로 1차 퀘스트는 완수했지만 아직 나머지 미션이 남았다. 바로 런던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숙소로 이동하는 일.
일단 숙소로 가는 여정은 이랬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전철을 탄 뒤 숙소가 있는 옥스퍼드 지역으로 이동하는 버스나 전철로 환승하는 것. 한국이었으면 간단한 일이었을 것을 왜인지 이곳에서 하려고 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약 내리는 정거장을 잘못 내린다면?
만약 내가 다른 노선의 지하철/버스를 타서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면?
만약 지금 구입한 오이스터 카드가 잘못되어 충전이 안되어 있다면?
만약 지금 매고 있는 가방이 너무나 부피가 커서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면?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하철을 타는 것 자체가 무서워졌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거 맞겠지? 구글에서 알려준 대로 이 지하철을 타면 되는 거 맞겠지?'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신경을 쓰며 혹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면을 반복하고 있는 나는 어느 순간 이 여행을 떠나온 것 자체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 몰라. 나 그냥 다시 한국 가고 싶어 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