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서 술례자가 되는 법

[알림] 술례자로 전직을(를) 하시겠습니까?

by 방망디

"민지는 술 좋아해?"


어느덧 제법 나이를 먹은 내가 새로운 사회(직장, 모임 등)에 나가면 항상 듣는 말이다. 내가 생각했을때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어색한 공기 사이로 '술 이야기'는 서로를 금방 친해지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중 하나랄까? 술을 함께 마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금새 친해져 서로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맛있는 안주 파는 집, 함께 먹으면 맛있는 술 조합 등 각자의 술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밀감을 쌓기 딱 좋다.


'술 이야기'가 시작되면 나는 항상 술례길을 걸었던 때가 떠오른다. 한국에서 감히 상상도 못 할 아침의 맥주 한 잔이라던가, 마트에서 파는 맥주나 와인을 사서 매일 밤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 시간들. 그 시간에 잠겨 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내 주위의 순례자들 모두 저마다의 테이블에 서로 다른 맥주가 한 잔씩 놓여있었다. 모두 까미노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술례자가 되려고 순례길을 떠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순례자와 술은 한 세트처럼 항상 붙어다닌 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침부터 순례자가 순례길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는 것은 참 자연스럽다. 왜냐면 그들의 아침은 새벽 5시부터 시작되니 오전 10~11시에 맥주를 시키는 것이 그리 아침 아니다. 오히려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랄까?


이른 아침 알베르게에서 눈을 떠 주섬주섬 침낭을 정리하고 하루 동안 편히 지냈던 짧은 방을 떠나며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하나하나 셈하며 배낭을 정리하고서 알베르게 로비에 모여 저마다의 순례길을 준비한다. 어떤 이는 아침을 먹기도 하고, 누구는 근육통에 파스를 붙이기도 하고 발에 있는 물집의 상태를 보기도 한다. 또 무릎이나 발목에 보호대를 착용하기도 한다. 같은 시간을 서로 다르게 보냈지만 알베르게를 떠나는 시간은 다들 비슷하다. 아침 7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준비를 마치고 다음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난다.


이제 막 올라오는 아침 해를 뒤로 하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까워진다. 선선한 아침 바람을 시원하게 만끽하는 것은 아주 잠시이다. 해를 가린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지는 8시쯤이 되면 점점 따가운 스페인의 햇빛이 머리카락부터 느껴진다. 뾰족한 햇살을 맞으며 걷다 보면 이젠 오르막길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더위에는 적응되었지? 이제 한번 오르막길을 오르면 또 한번 새로운 길이 펼쳐질 거야.


그야말로 죽음의 길. 5월의 뜨거운 더위가 어느 정도냐면 한 여름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가 바로 내 몸에서 피고 있다고 믿을 정도이다. 연신 몸에서 흘러내리는 땀 때문인지 계속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 갈증이 계속된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계속 물이 마시고 싶다. 지금 내 손에 있는 미지 근하 다 못해 따뜻한 이 물 말고 얼음이 가득 담겨 유리잔 밖으로 송골송골 물이 맺히는 그 물. 한 입 마시자마자 뒷골이 띵할 얼음물이 계속 생각이 난다. 그렇게 시원한 물 한잔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고 끝없이 외치며 걷고 걷다가 도저히 못 걷겠다고 다 때려치우고 길바닥에 드러눕고 싶을 때쯤에 바로 바(Bar. 스페인식으로는 '바르'라고 읽음)가 나타난다. 이제 나는 한 마리의 짐승이나 다름없다. 바로 바를 향해 돌격!


딸랑하는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아주 당당하게 카운터에 있는 주인장에 이렇게 외친다.


"Una Cerveza grande por favor! (맥주 한잔 큰 거로 주세요!)"


곧 나오는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면 열이 올랐던 몸과 마음이 사르르 식는다. 맥주 한 모금에 온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한 여름밤에 맥주를 맛있게 먹으려고 일부로 물 한 모금 안 먹고 갈증 난 상태에서 마신다는 거구나. 새로운 맛의 세상이다.


"아! 나 이거 먹으려고 순례길 걸으러 온 것 같아!"


이상하게도 순례길에서는 술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몇 가지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한국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순례길이 아니고 술례길이다.'라는 격언(ㅎ)과 이 말의 스페인 버전인 'No vino No camino(와인이 없으면 순례길이 아니다)'까지.


순례길과 술례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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