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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영 Feb 17. 2021

내가 쉼이 필요했던 이유와 질문들

보호소에 버려진 아기 강아지들은 입양이 되지 않았다. 날은 추워지고 걱정되는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던 나는 어느날 도저히 안되겠어서 다시 보호소로 향했다. 그리고 3마리를 입양해왔다. 모든 아이를 다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이 나를 가로막았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눈을 감고 아이 셋을 안아들었다. 입양을 하던 날도 강아지들의 밥그릇은 비어 있었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사료로 사료통을 채워주었다.     


나에게 와서 몇주가 지나고 내 침대에서 꼬물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다.


집에 도착해서 아기 강아지들에게 사료를 주니 사료를 잘 먹지 못했다. 아마도 사료를 먹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맨사료를 주고 배고픈 아이들은 그 사료를 그 작은 이빨로 어떻게든 부셔서 먹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캔사료를 믹서기에 갈아서 아이들에게 주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참 만감이 교차했다. 따듯한 집에서 꼬물꼬물 내가 준 유동식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좋기도 하면서 남겨진 아이들이 생각이 나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너무 귀여워서 내 발밑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내 노트북 위에 올려놓았다. 얼음이 되버린 틈을 타서 사진을 찍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렇게 아기 강아지들은 잘 먹고 잘 놀고 엄청나게 싸면서 무럭무럭 커갔다. 나는 새끼들이 귀여워서 하염없이 들여다 보았다. 전부 안고 물고 빨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나중에 너무 나에게 의지하게 될까봐 자기들끼리 어울려 지내도록 두었다. 그래도 미치게 귀여워서 못참고 안아올릴때가 있었지만 참을려고 무지 애를 썼다. 우리 집은 다견가정이므로 너무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게 되면 그 아이가 힘들어 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무리 중에서 제일 작은 아이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너무 귀여웠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이 우리집에 온지 3주쯤 되었을 때 ‘파보’라는 바이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보호소에서 입양을 온 애들은 모두 어김없이 파보라는 전염성 장염에 걸려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오래 지내줘서 이번만은 그냥 잘 넘어가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파보 장염은 어김없이 아이들을 공격했고 나의 간호에도 아이들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나는 점점 자괴감에 빠졌다. “왜 못 고치는거지? 왜 못 살리는거지?” 나를 힘들게 하는 질문만이 쏟아져 나왔다. 파보와의 사투를 벌이던 중 아침에 일어나보니 한 마리가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나는 너무 슬펐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다른 아이들이 놀래지 않게 조용히 아이를 수습했다.

     

내가 자리를 비울때는 항상 애기들은 따로 격리해두었다. 다른 아이가 해칠수도 있기 때문이다. 방에 와보니 저러고 잠이 들어있었다.


며칠에 걸쳐 결국 3마리 다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3마리가 모두 내 곁을 떠나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양손 안에 쏙 들어오는 그 아이들의 숨이 아스러져 갈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진통제를 투여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기진맥진해졌다. ‘나 혼자 뭐하고 있나... 내가 뭐라고 혼자 이렇게 사투를 벌이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내가 힘들때마다 꼭꼭 숨겨왔던 물음이 드디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모든게 허망하고 부질없이 느껴졌다. 여전히 나를 쳐다보는 수십개의 눈이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렸을 때 나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가 좀 힘드네... 금방 괜찮아 질 거야... 걱정하지마... 엄마는 절대 어디 안가...”     


한창 아플때 누워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이 아이를 살리지 못했다.


며칠을 잠만 잤다. 눈을 뜨면 보이는 그 아이들을 애써 지우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달라진 나를 누구보다 빨리 눈치채는 건 아이들이었다. 항상 시끌벅적하던 방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그게 마음이 아팠다. ‘일어나야해... 일어나야해...’ 수도 없이 되뇌었다. 나를 가만히 언제까지고 나를 기다려주는 이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나를 쓰러트린 것은 어린 아이들을 버린 인간이었지만, 나를 일으켜세운건 인간에게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나는 서서히 회복해나갔다.   

   

귤복이가 아이들을 잘 돌봤다. 둘이 같이 놀다가 잠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 이외의 일은 줄이고 쉬는 시간을 좀 갖었다. 그러면서 나는 끊임없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 첫 번째 질문이었던 “왜 못 살리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이 있었다.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고작 수의사에 불과하여 그들에게 고통을 줄여주는 일을 할뿐 그들의 생명을 내가 마음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나는 내 한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앞으로도 수많은 죽음 앞에서 나는 겸허히 나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지만 난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 결과는 받아들일 것이다. 나를 생체기 내는 일을 하기보다는 더 발전할 수 있도록 공부하는데 노력을 더 할 것이다.     

 

혼자 갈색이고 성별도 혼자 남자였던 아이였다. 정말 이쁜 아이였다.


두 번째 질문이었던 “나 혼자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책을 닥치는 대로 뒤적여 보았다. 이 물음에 정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아이들에게 본래 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 강아지들을 데리고 올 때 그저 따뜻한 온기와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었다. 깨끗하고 충분한 물도 제공하고 싶었다. 마음편하게 다리피고 잘 수 있는 보드라운 잠자리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다 주었다. 그들에게 내가 주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주었다. 이렇게 내가 본래 버려진 생명에게 주고자 하는 바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그 아이들이 바라는 것도 그리 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나눠주며 살자. 그들에게 그 정도는 허락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는 묵묵히 제공해주자. 더 많이 해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지 말고 내가 해주는 것에 기뻐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끌어안아 주자.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치료되는 것 같았다.      


나는 또 보호소에 갈 것이고, 또 피치 못할 아이를 데리고 올 수도 있다. 쏟아져 나오는 유기동물들 중에 한 마리의 생명을 거두어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생명은 단순히 머릿수의 집합체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은 하나하나 개체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한 마리가 됐든 열 마리가 됐든 다 소중하고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동물병원에서도, 나의 집에서도, 보호소에서도 한 마리 한 마리 전부 소중한 생명으로 대할 것이다.     


편백이는 아기들이 있으면 항상 조심한다. 자기가 아기들을 밟을까봐 겁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 가만히 아기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다.

잠시 봄날같이 따듯하던 날씨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쳤다. 마치 모든 걸 꽁꽁 얼려버리던 추운 날 나에게 왔던 아기 강아지들이 나에게 꿈같은 봄날을 선사하고 떠나간 것 같다. 아기들이 없는 이곳은 다른 아이들의 체온으로 따듯하지만 나는 아기들이 주었던 그 잠깐의 따스함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나에게 나비처럼 날아들었던 아기들을 지금은 저 하늘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저를 믿고 기다려주신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아마 모르시겠지만 여러분들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시고 계십니다. 그동안 저에게 힘내라고 응원의 댓글들에 얼마나 벅차게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더 힘내서 아이들과 저의 일상 이야기 많이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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