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베카 (1954)

지난밤 맨덜리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by 정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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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에는 레베카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에서 회상 장면 같은 것도 없으니 사람으로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늘 주위에 있다. 어쩌면 댄버스 부인이 말한 것처럼.


"전 때로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그분께서 맨덜리로 되돌아와 당신과 드윈터 씨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레베카, p.266)"


영화는 소설의 시작과 같이 그(드윈터 부인이라고 불릴 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지난밤 맨덜리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속 맨덜리가 내가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맨덜리와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 흑백이 아닌 컬러였다면 맨덜리의 꽃들과 나무, 풀들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싶은 아쉬움도 있었지만.




맥심이 드윈터 부인이 된 그를 데리고 맨덜리로 가는 순간 비가 억세게 쏟아 내리기 시작한다. 영국이야 비가 워낙 많이 오는 나라니까.라고 단순히 생각했다가도 맨덜리 저택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 비를 쫄딱 맞은 그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맨덜리에서의 생활이 순탄치 많은 않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게다가 저택 사람들(하인과 하녀)이 딱 서 있는 모습이 묘하게 소름 끼쳤다. 댄버스 부인의 권위적인 모습이 그만큼 잘 드러난 순간.




영화 내에서 음악이 정말 잘 사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반전이 밝혀질 때의 순간이나 초조한 순간, 위협의 순간 등 각 순간에 따른 음악이 극의 몰입도를 더 높여주었다. 심리 묘사를 충분히 연출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드윈터 부인은 자신의 어리숙함과 어린 나이(극 중 초반에서도 자신이 38살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를 부끄러워한다. 본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원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어른스러운(그리고 나이도 많은) 맥심을 만나면서 더 확고해진 게 아닐까. 게다가 직접 맥심에게 들은 것은 아니지만 맥심의 전 부인은 아름다웠고 똑 부러지는 사람이었지만 바다에서 보트 사고로 죽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자신 역시 맥심에게 어울리는 야무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막상 맥심은 그의 어리숙함과 순수한 모습이 좋다고 했지만. 자신은 한 번도 귀족적인 문화를 깊게 겪어본 적 없고 몇 달 전만 해도 어느 귀부인의 말동무로 고용된 상태였으니, 신분의 차이가 그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이자 부담이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신데렐라 플루트를 따라가지만 그들 부부가 맨덜리에 도착하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영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이 된 드윈터 부인은 신분의 상승은커녕 제자리인 느낌이다.


오죽했으면 하녀와 있는 것이 편하다고 나오기도 한다(소설 속에서). 어린 드윈터 부인이 커다란 저택에 압도되어 견디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커다란 저택은 영화 내 주요적인 배경이다. 저택의 구도는 제대로 나오지 않고, 주로 부분적인 공간으로 나오는데 모닝 룸, 맥심과 드윈터 부인의 방, 레베카의 방 등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미로 같은 맨덜리 저택의 구조에 마치 드윈터 부인이 된 것처럼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 드윈터 부인이 어디가 어딘지 헷갈리는 모습을 늙은 집사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숏이 불안해 보이는 것의 이유다. 웅장한 맨덜리 저택에 융화되지 못하는 드윈터 부인을 모습은 어쩐지 저택의 분위기처럼 씁쓸하고 기묘해 보인다. (보면서 영화 마더!(2017)의 집 구조가 생각난 것도 덤.) 외부인들은 늘 아름다운 저택이라고 기억하는 맨덜리의 속사정은 달랐다. 맨덜리의 모든 것 - 거울, 식탁, 창문, 커튼 등 - 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드윈터 부인을 둘러싼 저택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레베카와 닮은 행동, 모습을 하도록 권유한다. 드윈터 부인은 군말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다가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의 방을 소개해 준 직후에 한번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레베카가 무도회를 위해 썼던 초청장과 편지들을 모조리 꺼낸 후 댄버스 부인을 부르고 그녀에게 이것들을 내다 버리라고 얘기하는 드윈터 부인.


"이건 드윈터 부인의 것입니다."


댄버스 부인의 이 대사에서 노골적인 드윈터 부인(레베카가 아닌)에 대한 적대감과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으로서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내가 드윈터 부인이에요."


댄버스 부인은 알겠습니다,라고 순순히 답했으나 분명 드윈터 부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드윈터 부인에게 무도회 드레스 제작에 참고할 만한 초상화를 보여준다.


사실은 레베카가 입던 옷과 같은 옷이었던 것. 그 사실을 모르던 드윈터 부인은 무도회에서 맥심의 화내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알아차린다. 계속해서 레베카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드윈터 부인은 맥심으로 인해 완벽히 레베카의 모습과 분리되게 된다. 그럴수록 드윈터 부인과 전혀 다른 레베카의 이미지는 더욱 또렷해진다.


댄버스 부인은 극 중 드윈터 부인은 일종의 가스 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을 드윈터 부인에게 서슴없이 내뱉는다.






"당신이 드윈터 씨를 행복하게 했다고요? 아직 어리고 아는 것도 없는 당신이, 기껏해야 딸뻘밖에 안 되는 당신이? 당신이 인생에 대해 뭘 아나요? 남자에 대해 뭘 아나요?··· 당신이 맨덜리에 처음 왔을 때 하인들조차 비웃었어요. 당신은 절대 그분을 이길 수 없어요. 그분은 아직도 이곳 안주인이에요. 진짜 드윈터 부인은 바로 그분이지요. ···우리는 아무도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도 마찬가지죠. 죽어야 할 사람은 드윈터 부인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레베카, p.379)"


드윈터 부인은 이 공간에서 댄버스 부인의 속삭임에 죽을 뻔한다

댄버스 부인은 결국 마지막에 그토록 사랑했던 레베카의 공간인 맨덜리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맥심은 자신의 공간인 맨덜리에 드윈터 부인을 데려와 자신이 겪은 끔찍한 사건을 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일은 잊히지 않고 댄버스 부인에 의해서 부부 관계마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맥심이 레베카를 죽였다는 것. 그리고 레베카의 시신과 보트가 발견되었다는 것. 그 사실을 가까스로 드윈터 부인에게 털어놓은 맥심은 자신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드윈터 부인은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그 뒤로는 무섭도록 침착하다.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는 맥심과 침착한 드윈터 부인으로 포지션이 바뀐 것이다. 맥심을 안심시키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재판 도중에 기절하는 척을 하며 맥심을 구하기도 한다. 그렇게 드윈터 부인은 더 이상 어리바리한 어린 여성이 아니다. 그렇게 사건이 진행되면서 맥심의 죄책감은 사라지게 되고 드윈터 부인 역시 안도한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불타고 있는 맨덜리.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댄버스 부인. 이들 부부는 맨덜리라는 공간에서 벗어남으로써 해방된다. 억압과 죄책감 그리고 공포로부터.





분명히 소설과 영화는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작품 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생각해보면 영화 스토리 상 아쉬운 점은 맥심 누나의 출연 빈도가 소설보다 낮았다는 정도? 반면 소설 속에서는 마지막에 사라져 버리는 댄버스 부인과 달리 불타는 대저택에 있는 댄버스 부인을 비추는 이미지가 훨씬 좋았다. 히치콕의 방식대로 공간, 인물, 사건 등이 바뀌는 것 역시 흥미롭다. 그러니 영화와 소설 둘 다 본다면 더욱 극적인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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