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드라마 작품집 시리즈 : 박해영의 『나의 아저씨』
박해영 작가의 인물들은 지독하게 쓸쓸하고 슬프다. 가진 게 없거나. 겨졌다가 잃었거나, 가져볼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문득 누군가와 만나면서 자신의 쓸쓸한 그림자와도 마주치고 당황한다. 익살스럽거나 재치 있는 대사를 치는 인간들도 알고 보면 서럽고 쓸쓸한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게 박해영의 힘이다. 특이한 점 하나는 박해영의 《나의 아저씨》 극본은 지문에도 심리 묘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훈이 지안에게 이름의 한자 뜻을 물을 때 '이를 지(至)와 편안할 안(安)이'라고 대답하자 "좋다"라고 하는데 그냥 좋다고만 쓰여 있는 게 아니고,
지안 :... 편안할 안이요.
동훈 :...! (처지와 정반대인 이름, 짠하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좋다... 이름 잘 지었다.... (커피를 들고 자리로)
이런 식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사가 아닌 지문에도 대사와 같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연기자들이 다른 길로 샐 염려가 없다. 이선균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촬영하기 전에 감독이 이 대본을 악보에 비유했다고 하던데 대본집을 읽어보니 비로소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책에는 인터뷰와 사진 등의 부록이 좀 붙어 있는데 2권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만 읽어봐도 대박이다. 슬픈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난다. '서사보다 인간의 결을 느끼고 싶어서 영화와 드라마를 본다'는 철학을 가진 박해영 작가는 자신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역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촘촘히 부여한다. 그리고 그런 정성 속에 무심한 듯 빛나는 명대사들이 속속 탄생한다. 특히 지안이 후계동 사람들에게 할머니 장례식 때 도움을 받고 이 은혜 꼭 갚겠다고 하자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녜요."라는 제철의 대사를 듣고 어느 시청자가가 '풀려나는 기분이었다'라고 썼다는 댓글 소개는 찡했다.
1권 말미에 있는 '감독의 말'을 읽어보면 만드는 사람들 모두 이 드라마를 얼마나 사랑하면서 작업했는지 알 수 있다. 인터뷰어가 《나의 아저씨》를 촬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아보라고 하자 김원석 감독은 4화 건축업자를 찾아간 동훈의 망치 신(상훈을 무릎 끓게 했던 건축업자를 찾아간 동훈이 건축구조기술사 지식을 활용해 조그만 망치로 벽을 두드려 가며 협박하던 장면), 5화 술에 취해 눈길에 미끄러진 동훈이 걱정돼 뛰어가는 지안, 7화 유라가 정희네에서 망가진 게 좋다고 말하는 장면, 처음으로 지안이 웃는 엔딩..... 15화 지안이 길에서 "잘못했습니다"를 열 번 외치는 장면..... 이외 정희네와 요순 집, 후계동 골목의 모든 장면 등등을 하나하나 꼽는데, 그 자체로 감동이다.
이러다가 대본집 리뷰를 쓸 기세다. 더 궁금한 분들은 어서 책을 구입하시라. 이 인생드라마 작품집은 "좋아하는 그림을 벽에 걸듯, 좋아하는 드라마를 머리맡에 놓아둘 수 있다면"이라는 기획의도로 제작되었다고 하니까. 잘 쓴 대본을 읽으니까 나도 좋은 드라마를 써보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나는 이 대본집을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읽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