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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04. 2022

진정한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등장

11년 전에 쓴 『7년의 밤』독후감을 우연히 찾았습니다

페이스북에 '오늘의 과거'라는  가끔 뜨잖아요. 어제는 제가 페이스북 페이지에 썼던 독후감 하나가 뜨더군요. 11 전이라  에버노트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 글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읽어보고  가지를 느꼈던 글이었습니다. 첫째, 지금은 내용을  잊어버린 소설인데 리뷰를 다시 읽으니 그래도  기억이 나는구나. 둘째,  언제나 책을 읽고  흥분이 가시기 전에 리뷰를 써야 하는구나. 이번 글도 책을 읽은 직후 잔뜩 흥분한 상태로   역력하지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이런 식의 글쓰기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낄  있는 글이기도 했습니다(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스포일러가 있는 글이니 소설을 아직  읽으신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전율한다. 아, 어쩌면 이렇게 친일파에 대한 묘사가 뛰어날까. 어찌 이리 공감이 팍팍 갈까. 그들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펼쳐질 정세에 대한 판단, 그리고 기득권으로서 지닌 본능적인 후각까지… 혹시 작가가 원래부터 친일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런데 『태백산맥』을 읽어보면 이 사람은 또 영락없는 빨치산이다. 조정래는 이런 끝내주는 대하소설을 세 편이나 썼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정유정이 『7년의 밤』에서 악당 오영제를 묘사할 때 똑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영제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령마을의 유지다. 치과의사라는 멀쩡한 직업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악독한 새디스트다. ‘교정이 필요하다’라는 내재율 하에 밤마다 아내를 때리는 것은 물론 어린 딸도 툭하면 곤죽이 되도록 팬다. 그건 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망간 엄마를 그리며 ‘엄마놀이’를 하다 잠든 세령을 깨워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벽에다 머리를 처박을 때 ‘벌어진 입안에서 석류 알 같은 알맹이 두 개가 튀어나왔다. 앞니겠지, 생각하며 그는 실내등 스위치를 켰다’라는 담담한 묘사는 정유정이 얼마나 캐릭터들을 잘 형상화하는지 알려주는 작은 예일뿐이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최현수.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덩치에 대학 때부터 천재적 포수로 이름을 날린 야구선수였으나 프로에 입단한 후 별 볼 일 없이 빌빌대다가 ‘용팔이’라 불리는 어깨 통증으로 인해 그 생활도 접고 지금은 경호전문 보안업체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든 내 집을 마련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내 강은주의 성화에 못 이겨 이번에 세령호라는 저수지의 관리인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남편은 생물학적으로 세 살, 정신적으로는 열세 살쯤 연하인 어린애였다. 야구 말고는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덩치 큰 미숙아였다. 야구를 그만둔 후부터는 하루가 멀다고 술에 취해오는 술꾼이 되었다. 그런 인간을 목을 잡아다 취직시키고, 세상이라는 정글에서 사는 법을 가르치고, 남편이랍시고 간수해오면서 그녀는 온갖 직업들을 두루 섭렵했다. 식당 종업원, 마트 캐셔, 간병인, 학교 급식 아줌마…


결혼 12년 만에 장만한 이 집은, 그녀에겐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33평이라는 수학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강은주는 지니처럼 살지 않았다는 근거였다. 자신의 개 같은 인생과 맞붙어 싸웠다는 삶의 증거물이었다. 아들 서원의 미래에다 거는 엄마의 약속이었다. 너만큼은 맨주먹으로 정글에 뛰어들지 않게 할 것이라고.


최현수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남자다. 야구밖에 몰랐으나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잘하는 건 술 마시는 것밖에 없었으며, 급기야 음주운전을 한 상태로 세령호에 가다가 어떤 여자애를 치었다. 맨발에 팬티바람인 이 여자애는 현수의 차에 치어 죽어가면서 “아빠….’라고 중얼거리고 이에 자극을 받은 최현수는 절명 직전인 여자애를 충동적으로 세령호에 던져버린다. 살인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살인사건을 숨기고 세령호에 내려와 일을 하게 된 최현수는 죽은 소녀의 아버지 오영제의 추격을 받게 되고 동시에 경찰에게도 의심을 받게 된다. 여기에 매와 학대를 못 이겨 도망친 오영제의 전처 문하영과 세령호 경비 동료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살인 현장 목격자 승환 등이 겹쳐 일은 복잡하게만 꼬여간다. 결국 최현수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수문을 열어버림으로써 세령마을에 사는 사람 전부를 수장시킨 살인마가 되었고 전 국민이 비난하는 흉악범으로 찍혀 사형을 언도받는다. 아들 서원은 그 사건 이후로 학교도 그만둔 채 전국을 떠돌게 된다.


『7년의 밤』은 ‘세령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살인과 복수, 그리고 이어지는 7년간의 음모와 또 다른 복수로부터 아들을 지키려는 용의주도한 계략과 실천에 대한 이야기다. 오영제는 자신의 딸을 죽인 최현수는 물론 그의 아들 최서원, 그리고 그들을 돕는 승환에게까지 보다 잔인한 복수를 하려 한다. 그런데 멍청하기만 했던 최현수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어느 순간부터 놀랄만한 기지를 발휘해 오영제와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정유정은 선이 굵고 뚝심이 있는 작가다. 5000만 원의 상금을 탄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1억 원을 탄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 그리고 2년 만에 전작으로 내놓은 『7년의 밤』까지 정유정은 뚜벅뚜벅 자신이 원하는 길을 향해 침착하지만 힘차게 걷고 있다.


성실한 취재 및 사전 조사와 치밀한 구성, 기지가 번뜩이는 소재 선택과 반복되는 퇴고 등이 작가의 작품 장악력을 최고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뚜렷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소설이지만 문체와 캐릭터 구축 능력도 뛰어나다. 강은주가 남편을 처음 만날 때 여동생과 나누는 대화를 조금만 살펴보자.


 “언니, 이 남자, 팀 로빈스야, 케빈 코스트너야?  

 영어문장보다 어려운 말이었다. 

 “분위기 말이야. 어느 쪽이냐고.”  

역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케빈 코스트너는 아니었다. 팀 로빈스라는 배우는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랐다. 영주가 왜 그런 걸 묻는지도 몰랐다. 영주는 은주를 새삼스럽게 뜯어봤다.  

 “언니가 수잔 새런든은 아닌 거 같은데. 우선 가슴이 자두잖아.”  

 그래, 네 젖통 크다. 은주는 하고 싶은 말을 참고, 해야 할 말을 했다.  

 “좀 쉽게 말할 수 없겠냐?”


잠수부인 승환이 한밤중에 수몰된 옛 세령마을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장면은 매혹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그러나 여기엔 괜히 아름답기만 한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엔 왜 승환이 잠수부여야 하는지, 현수가 전직 포수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들이 빼곡하게 숨어있다. 또한 서원이 아빠에게 선물한 해골 모양의 야광 액세서리의 활용은 에드거 앨런 포우에 대한 오마주로 읽힐 정도로 인상이 깊다.


『7년의 밤』은 500 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읽힌다. 뚜렷한 사건이 있고 흥미로운 캐릭터들, 치밀한 구성과 탄탄한 문체가 함께 어우러진 탓이다. 벌써 수많은 영화인들이 이 소설의 영화화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정유정 본인은 “구성은 스티븐 킹에게, 문체는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언론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소설가가 한국에 나타났다고 흥분한다. 그러나 나는 정작 『7년의 밤』을 읽고 나서 정유정이 미야베 미유키의 속도감이나 기리노 나쓰오의 포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대부분의 독자들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진정한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등장’이라는 나의 주장에 그리 쉽게 어깃장을 놓지는 않을 것이다. (2011년 5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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