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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07. 2022

바닷가에 가서 술 마시던 이야기

나는 왜 밤바다로 달려갔을까?


스물몇 살 시절부터 답답하면 바닷가로 달려가  술을 마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강릉 경포대 바닷가에 있던 '로얄민박'은 방문만 열어젖히면 낮은 담장 위로 바다가 넘실거리는 꿈같은 곳이었다. 나와 뚜라미 후배들은 로얄민박 툇마루에 개다리소반을 놓고 앉아 술을 마셨다. 술잔에 청춘이 담기고 달이 담겼다. 낮이고 밤이고 라면과 김치 안주에 술만 마시고 있는 한심한 선배들을 보고 여자 후배가 물었다. "오빠들, 우리 바닷가는 언제 나가나요?" 나는 대답했다. "바다를 뭘 나가? 여기서 다 보이는데......" 후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다니던 직장마다 일이 많아서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야근에 지치고 광고주의 구박과 압박에 시달린 동료들은 한밤중에 갑자기 차를 몰고 동해로 달려가자고 외치곤 했다. 한밤중의 바다는 굉장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파도 소리만 요란했다. 우리는 허연 구렁이처럼 꾸물꾸물 자신의 몸을 말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밤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둘러 술집으로 들어가 파도 소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어차피 깜깜한 밤중에 파도 소리나 들으며 술을 마시다 아침에 돌아올 거면 서울에서 파도 소리 녹음한 거 틀어 놓고 마시면 되지 뭐하러 바닷가까지 달려가느냐 묻는 놈도 있었다. 나는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놈의 주둥이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저런 게 어떻게 내 친구였을까. 너는 이제 아웃이다. 노희경이 극본을 쓴 《굿바이 솔로》라는 드라마에서 카페의 월급 사장으로 일하던 김민희가 생각났다. 선배 언니인 배종옥하고 바다에 가서 냅다 소리를 지르며 울던 김민희는 주차장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간절하게 말한다. "언니, 우리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우리 조금만 더 울다 가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 씩 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 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 시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1997)  「토막말」 전문)


한때 시인이었던 영화감독 유하는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에 가야 한다'라고 했지만 압구정은 너무 눈이 부시고 화려해서 겁이 났다. 비겁한 쫄보에겐 역시 바닷가가 제격이었다. 이제 바닷가로 함께 달려가던 친구들은 곁에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잘 살고 있겠지. 새벽에 일어나 문득 파도 소리가 그리워진 나는 노트북을 켜고 책을 펼쳐 보지만 거기엔 바다가 한 톨도 없다. 태초부터 수만 년 동안 철썩거리며 허무를 이겼을 바다를 생각하면 신기하다. 다음에 가면 그 비법을 물어봐야겠다. 성의 있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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