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y 14. 2022

급똥 천사

오늘 아침에 길에서 큰일 날 뻔했던 이야기

나는 천 원자리 두 장을 거울 뒤에 야무지게 꽂아놓고나왔다. 

아내가 채개장을 끓였다. 채개장은 야채로 끓이는 육개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소고기를 먹지 않은 아내는 가끔 고사리 얼갈이 대파 느타리버섯 숙주 등을 넣고 채개장을 끓이는데   끓일 때마다  냄비에 넉넉하게 하는 편이다. 이웃에 사는 비건 친구  명과 나눠 먹기 위해서다토요일인 오늘 아침, 언덕 위에 있는 집에 사는 친구 집에 배달을 다녀온 나는 들어오자마자 또 채개장이 든 가방을 들고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다. 이번엔 경신고등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아침 운동하는 사람들처럼 경쾌하게 걸으며 즐거워했다. 최순우옛집을 지나면서 어제 봤던 연극 얘기를 하다가 계단에서 성북동깁밥집 사장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언덕을 다 올라가 서울왕돈까스 근처를 지날 때 갑자기 배가 아팠다.


"으..."

"왜, 똥?"

"응."

"빨리 체육관으로 가"

"응."


나는 가방을 아내에게 맡기고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안으로 뛰어갔다. 예전에 수영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어서 화장실 위치를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현관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으아. 옆에 있는 종로아이들극장으로 가보니 거기도 문이 닫혀 있었다. 아니, 오늘 아침엔 수영하는 사람도 없나? 나는 다급하게 다시 정문 쪽으로 향하다가 정자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여기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다짜고짜 물었더니 자기들도 육관 문이 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체육관은 8 반에 연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말도  되는 질문을 하고 있는 나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내는 얼른  해장국집으로 가라고 나를 떠밀었다. 똥이 급하면 정신을  차리는 나를  알고 있는 아내의 처방이었다. 나는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는 혜화동9번지해장국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저, 급해서 그러는데...... 돈을 드릴 테니까 화장실 좀."

"아니, 화장실 쓰는 데 무슨 돈을. 그냥 들어가요."

"네. 아침부터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깜깜한데. 불을......"

"응, 여기 스위치를 누르면 돼."


나는 불이 들어온 쾌적한 화장실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문화인 인척 하고 작가입네 행세를 하려 해도 길에서 똥을 싸는 순간 모든 게 다 날아가 버린다. 해장국집 사장님은 그런 나를 구해준 천사가 아닐 수 없다. 지갑을 뒤졌다. 딱 이천 원이 있었다. 이거라도 드려야지. 그런데 내가 이걸 드리면 안 받으려 하겠지? 겨우 이천 원을 내미는 것도 창피하고. 여기다 두고 나가자. 변기 위에 놓고 나가려다가 그러면 기분 나빠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다른 곳을 찾았다. 왼쪽 벽에 작은 거울이 걸려 있고 그 사이에 틈이 있었다. 거울은 너무 작아 거기에 내 자아를 비춰볼 수도 없었다. 나는 거기에 천 원짜리 두 장을 야무지게 꼽아놓고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뒤를 돌면서 안에 이천 원을 놓고 나왔다고 말했다. 사장님이 돈은 무슨 돈이냐고, 다시 가지고 가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이미 밖으로 나와 아내를 향해 냅다 달리고 있었다.

무사히 친구에게 채개장을 가져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해장국집 사장님 덕분에 큰 위기를 또 한 번 넘겼다며 웃었다. 우리도 집으로 와서 밥을 하고 채개장을 끓여먹었다. 매번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경신고등학교 내리막에 있는 해장국집. 휴일 아침에도 일찍 문을 연다. 
아내가 끓인 채개장. 채소를 넣고 끓인 육개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건들이 먹기 좋은 음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행성 책쓰기 워크숍 수강생 모집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