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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27. 2022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알 수 없는 가치들

연극 《엘리스 인 베드》

주인공은  침대에 누워 있다. 게다가 여러 여배우들이 돌아가며  역을 맡는다. 미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수전 손택이 죽기 전에 남긴  하나의 희곡을 원작으로  연극 《앨리스  베드》를 보았다.  《로드  인터 씨어터》에서 낯을 익혔던 성수연 배우나 《엔젤스  아메리카》에 등장했던 권은혜 배우가 나오니까 작품의 질이나 완성도야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 생각했는데 같이  작품을 보기로  박재희 선생이 오더니 걱정을 했다. 바로 전날 연극계 인사  분이  극이 아주 형편없다고 하는 소릴 우연히 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분야 권위자의 말이라 신경이 쓰이는  같았다.


독백을 방불케 하는 관념적인 대사들이 길게 이어지고 앨리스 역을 맡은 배우들이 수시로 바꾸는 등 처음엔 극이 좀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심플하면서도 매력적인 공간 구성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그런 거부감이 점점 사라지더니 어느덧 나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과거의 인물들을 차례차례 불러내는 앨리스의 대화 능력에 빠져들었다. 특히 그녀가 불러낸 사람 중 에밀리 디킨스는 1,800여 편의 시를 썼지만 35년간 전혀 외출을 하지 않은 인물로 알려진 인물이라 더 신선했고 『19세기의 여성』이라는 세계 최초의 페니미즘 책을 썼다는 마가렛 포러의 소환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해주는 좋은 선택이었다.


마지막 즈음에 어린 도둑으로 나온 권은혜 때문에 많이 웃었고, 마지막 앨리스로 분한 김광덕의 원숙한 연기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우리 동네 주민이었기에 살짝 아는 사이이기도 했는데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이혜영의 출연으로 화제였던  《메데이아》에서 봤을 때는 그저 작은 배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긴 그게 벌써 몇 년 전인가. 잘 성장하는 배우를 목격하는 것은 즐겁고도 뿌듯한 일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좋았던 연극의 감흥을 이기지 못하고 명동에 있는 작은 맥주집에 가서 먹태 안주에 생맥주를 잠깐 마셨다. 박재희 선생과 윤혜자는 '이게 거의    일이고, 수잔 손택이  극을  것도 수십  전인데 아직도 여성에 대한 처우나 시각은 크게 달라진  없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밀란 쿤데라가 소설 『불멸』에서 베토벤   셀럽들을 자유롭게 불러내 대화를 나눈 것처럼  연극에서도 그런 장치가 매우 효과적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으나  사람의 열띤 토론에 밀려 조용히 맥주만 마셨다. 그러나 좋은 연극을 보았다는 흐뭇함은  사람 모두 똑같았다. 연극을 보기  부정적인 평을 들어 기분이  찜찜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것이다. 역시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없는 가치들이 세상엔  많다는 것을 깨달은 밤이었다. 9 18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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