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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4. 2022

국악계의 블록버스터

고선웅의 창극 《귀토》

고선웅은 무대 위에 많은 사람을 등장시키는 걸 좋아한다. 지난 4월에 봤던 중국 희곡 낭독 공연 《찻집》에서도 커튼이 올라가자 수십 명의 배우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거나 싸움을 하며 왁자지껄하고 있었고 이번에도 총 51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 올랐으니 그의 블록버스터 성향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번엔 사람이 아니라 산속과 바닷속에 사는 동물들이다. 주인공인 토끼 가족과 거북이 부부가 나오고 용왕을 보좌하는 쭈꾸미 등도 비장하고 익살스러운 캐릭터로 나온다.

산속에 사는 토끼들은 삼재(三災)와 팔란(八難)에 시달리는데 삼재란   하늘과 땅 사람에게 겪는 큰 카테고리의 재난이고 여기에 추위, 덫, 독수리, 호랑이 등 구체적인 품목들이 팔란이란 이름으로 따라다닌다. 이래저래 살기가 녹록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토끼의 자식인 토자는 여자 친구 토녀와 함께 산을 떠나 평화로운 바다로 가서 살려고 한 것인데, 알고 보면 바닷속도 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다. 토끼는 평소 간을 시냇물에 씻어 나무에 걸어 놓는다는 거짓말로 위험을 모면한 아버지와 달리 아들 토자는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피곤해 간이 안 좋은 상태이니 하룻밤 푹 재우고 좋은 걸 먹이라'는 용왕의 배려에 의해 반란의 변을 구상할 시간을 번다.


원작인 '수궁가'를 살짝 비튼 이 창극은 극본과 연출에 모두 능한 고선웅이 총지휘를 맡았고 국악계의 아이돌인 김준수와 유태평양, 민은경 등이 출연하는 대작인 데다 분위기는 마당극을 방불케 할 정도로 흥겨워 모든 관객들이 깔깔깔 웃을 수 있는 '관객 친화적' 창극이다. 김준수와 민은경은 두 손을 꺾어 모으며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연기로 바로 토끼가 되었고 유태평양은 걸핏하면 드러누워 거북이가 되는 능청을 떤다. 다른 배우들도 춤이나 노래, 율동에서 한치의 허점이 없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고전과 현대극 언어를 총동원한 고선웅의 익살스럽고 찰진 대사들은 무대 양쪽 LED 자막으로도 보이는데 문어체는 없고 모두 입말 그대로 나와서 너무 좋았다. 배우들의 대사 능력도 경이롭다. 용궁에 가서 벌이는 서로의 환란 대결은 랩 배틀 저리 가라인데, 도대체 저 많은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웠나 싶을 정도다.


공연 중간 인터미션 시간에 객석에서 우연히 양희경 선생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국악평론가 윤중광 선생과 함께 오신  같았다. 145분의  공연이었지만 지루할 틈이 없이 흘러갔다. 9 1 목요일 저녁에 보았는데 너무 피곤해 리뷰를 쓰지 못하다가 '이러다 그냥 지나가면 후회하지'라는 생각에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쓴다. 날짜를 보니 94일인 오늘까지 공연한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이런 블록버스터는   업그레이드되어 관객 앞에 나타난다. 기억하고 있다가 성의를 가지고 살피면 언제든지 다시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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