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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9. 2022

타인의 안부를 물었던 밤

11월의 소금책 최은숙의 『어떤 호소의 말들』

한 달에 한번, 금요일 저녁에 저희 집 소행성에서 열리는 책 수다가 바로 소금책입니다. 작가와 손님들을 모시고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질문과 대답을 듣는 시간이죠. 어제는 저희 부부가 진행하고 있는 '소행성 책쓰기 워크숍' 멤버였고 브런치에서 '최오도'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다가 워크숍 도중에 출판 프로젝트 대상을 받아 책을 낸 최은숙 작가 편이었습니다. 최 작가님은 인권위원회에서 이십 년 넘게 조사관으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하고 이상한 사연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조사관으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작은 스피커 하나 연결하고 싶었다'라는 말로 책의 날개에서 집필 동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의 기획자이자 소금책이라는 이름을 지은 윤혜자 씨가 어묵과 청주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11명의 손님들이 도착했습니다. 원래는 12명인데 성화숙 선생이 열이 좀 있는 것 같다고 스스로 불참을 선언하시는 바람에 한 자리가 비었습니다. 마침 일찍 들어와 있던 손님방의 김혜민 씨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이 오셨고 『메모 독서법』의 저자 신정철 선생이 함께 독서토론회에서 활동하신다는 김현자 선생님과 오셨습니다.  거의 개근 멤버인 문영주 선생, 오은서 선생이 오셨고 임선정 선생, 이경희 선생, 김지현 선생도 오셨습니다. 이번 달엔 특히 제가 '음주일기'를 쓰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한문정 선생이 오셔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뛰어다녀야 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야 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을 받으며 어떤 모멸감을 느끼고 사는지에 대해 쓴 책 내용을 얘기하며 북토크를 시작했습니다. 통조림 두 개를 훔쳐 일 년 넘게 옥살이를 했던 사연이 애달팠고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 와서는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왔다"라고 말해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이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중국집 주방장이라 자신을 소개했으나 알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던 진정인에 대한 이야기도 최 작가님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최은숙 작가는 '내가 쓰긴 했지만 책을 다시 읽다 보면 독자가 된 느낌'이라며 웃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저는 그만큼 책을 쓴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라 이해했습니다.


최은숙 작가는 인권의 지표를 정할 때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넘어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하다'는 피터 비에리의 말을 소개함으로써 인권전문가다운 면모를 선보였습니다. 장발장처럼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 사이사이로 인문학적 통찰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썼을 뿐이라고 겸손해했지만 문장력과 지식이 모자라는 작가의 책을 창비에서 내줄 리가 없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좋아하는 책에 대해 물었더니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 등 현대의 고전들이 앞다투어 호명되었습니다.


책 후반부에 있는 고양이 '불이'의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드라마에서 촬영 도중 사망한 말 이야기로 시작해 공장식 축사와 전염병으로 인한 동물들 살처분, 공원에서 만난 비둘기의 다친 발까지 이어지는 저자의 '사고의 확장'이 눈부시게 펼쳐진 좋은 글이니까요. 그런데 어제 들은 가장 찡한 사연은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분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면허가 없으면 큰일 난다'며 제발 도와 달라고 했던 분이 있었는데 결국 인권침해와는 상관이 없다고 판명이 났다고 합니다. 불행한 결론을 접한 그가 인권위로 전화를 걸어 원망과 욕을 쏟아내자 최은숙 작가도 짜증이 나서 "그러게 왜 음주운전을 하셨어요?"라는 원망의 말을 흘리고 말았는데 직후에 그분이 자살하셨다는 걸 '수취인 사망'이라는 문자를 통해 알게 된 작가가 사무실이 떠나가라 울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윤혜자 씨가 만든 어묵 국물과 청주가 따뜻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작가가 들려주는 온갖 억울하고 황당한 사연들이 가슴을 적셨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즐겁고 흐뭇한 북토크였습니다. 아내와 저는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거실과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며 "며칠 전부터 신경 쓰고 준비하느라 힘도 들고 시간 투자도 많이 해야 하지만 그래도 소금책 하길 참 잘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물론 이번 달 행사 역시 금전 상으로는 마이너스였지만  '쓸데없는 일을 할수록 행복해진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니까요. 어제 오신 분들 모두 집으로 잘 돌아가셨으리라 믿으며 새벽에 이 글을 씁니다. 오늘은 소금책만큼이나 돈과는 상관없는 행사 '독하다 토요일'이 열리는 날이라, 지금 말고는 후기 쓸 시간이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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