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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01. 2022

화장실에 비치해 놓고 읽는 시집

박연준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몇 달간 우리 집 화장실 로션 박스 옆에 놓여 있는 시집은 박연준 시인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입니다. 제목을 처음 읽었을 때 기이하게 시집 전체의 분위기가 확 느껴지던 걸 기억합니다. 물론 짐작대로 이 시집엔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인 사랑과 연민, 애증 등이 들어 있지만 그보다 자기 딸을 처제라고 불렀을 때의 막막한 슬픔과 존재의 고독(비록 본인은 치매나 섬망 중이라 그걸 느낄 새도 없었겠지만)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저도 돌아가시기 직전 한밤중 입원실에서 갑자기 말문이 터진 어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1.4 후퇴 때 가족들과 헤어져 덕경이 엄마라는 고향 친구와 부산까지 내려가서 ‘미제 장사’를 하던 이야기, 얼음장처럼 차갑던 냉골에서 사흘이나 굶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신음했던 이야기, 깡보리밥을 하도 먹어서 지금도 보리쌀의 세로줄만 봐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이야기 등등을 밤새 방언 터뜨리듯 하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는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6인병실에 울려 퍼졌습니다. 다른 환자분들이 주무실 시간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차마 어머니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운 좋게 병실을 지키고 있던 저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선물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막내며느리가 떠주는 미음을 맛있게 드신 어머니는 이틀 후에 조용히 돌아가셨습니다.


시인들은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틀림없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시집 안에 실린 「뱀이 된 아버지」라는 시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라는 첫 문장부터 눈물이 나는 시입니다. 평소에 시를 자주 읽지 않는 분이라도 이 시집은 꼭 한번 사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얘기 말고도 재미있고(‘앞니’를 ‘압니’라고 쓰고 싶은 충동이 일어요) 슬프고(나는 이 작은 별에서 번식하는 바이러스가 그리움의 주파수에서 잡힌다는 것을 안다) 새로운 해석의 예(바지를 벗어놓으면 바지가 담고 있는 무릎의 모양 그건 바지가 기억하는 나일 거야 바지에겐 내 몸이 내장기관이었을 텐데)가 가득합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시집은 홍대 앞에 있는 책방무사 서울점에서 박연준 시인이 일일서점원으로 근무하던 날 가서 산 책 중 하나군요. 그래서 저는 운 좋게도 박 시인의 사인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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