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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18. 2022

운세가 아니라 운명을 만드는 수비학 이야기

2022년 12월의 소금책 : 한민경의 『나의 럭키넘버』

한민경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점이나 운세를 보러 가면 "너는 부모복도 없고 남편복, 자식복도 없다."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기분이 나빴겠죠. 게다가 점쟁이 말이 맞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와 고생을 거듭했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그런 깨달음이 오더랍니다. 부모복이나 남편복 없어도 계속 이렇게 사람 구실 하며 사는 걸 보면, 나는 그런 복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아니었나?  


성북동 소행성에서 금요일 저녁에 열리는 책 수다인 소금책의 주인공은 '연희동 한선생'이라 불리는 한민경 선생이었습니다. '한민경의 타로수비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책 『나의 럭키넘버』가  소금책이었고요. 소금책을 기획하고 타이틀까지 지은 기획자 윤혜자 씨는 연말이라 새해 계획이나 막연한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12월은 한 선생을 모셨으면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티켓은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매진이 되었습니다. 아니, 매진이 되었는데 행사 바로 전날 취소를 하거나 결석을 한 분이 두 분이나 생겨서 다른 분으로 대체되는 일이 있었죠. 오시기로 한 분이 다치거나 가까운 분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였습니다. 우리는 운명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다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는 강의 주제를 생각하면 우연 이상의 계시가 느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한민경 선생은 달변이시더군요. 아주 어렸을 때 <여학생>인가 하는 잡지에서 오렸던 엉터리 타로 카드로 연애 상담을 해주던 시절 얘기부터 시작해 미국 캐나다로 수비학 유학을 떠나 외국인들에게 타로점을 봐주던 이야기, 서른한 살에 암 선고를 받았던 이야기,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혼수 때문에 깨졌던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습니다. 그중에도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데 회사에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A4지 때문에 퇴직을 미뤘다는 이야기는 엉뚱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사연이었습니다. 저도 광고회사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살 때 A4지 한 장 가격이 얼마인지 알게 된 게 굉장히 서글픈 일이었거든요.


서양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라고 묻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쯤 되겠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한민경 선생은 우리는 '달력대로 산다'며 선형적인 세계관에 익숙한(여성의 경우는 특히 팔자타령에 가스 라이팅 당하고 살아온) 우리의 고정관념에 일타를 가합니다. 그것은 이별이나 이직, 승진, 이사, 손실 등은 행복한 일도 불행한 일도 아니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책 내용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죠.  생년월일을 사용해 뽑은 연도 카드를 들고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민경 선생의 '우리는 똑같은 걸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선형 계단을 오르듯 전진하고 있다'면서 불행을 행운으로 바꾼 사람들의 예를 들려주었습니다. 물론 거기엔 한 선생 본인의 이야기도 있었고요. 한 선생의 팬을 자처하는 고현희 선생은 멀리 춘천으로부터 오셨고, 충주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진우 교수(저와 홍익대 뚜라미 활동을 같이 했던)는 한 선생의 예전 책  『무슨 걱정인가요』를 들고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매번 소금책에 참여하시는 단골 선생님들도 오셨고 아내가 운동하러 다니는 압구정동 '펠든크라이스무브'의 김윤진 대표와 임소연 선생도 오셨습니다.  


타로나 수비학은 미신도 아니고 점도 아니었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운세가 아니라 운명을 만드는 학문에 가깝죠.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패턴을 '럭키 넘버'로 꿰뚫어 삶의 방향성을 가늠하게 해주는 신박한 학문입니다. 한민경 선생이 미리 뽑아 온 럭커 넘버를 받아 들고 다들 탄식과 웃음이 교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이나 미래가 궁금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고 다만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는 다소 뻔한 결론을 얻었음에도 다들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받은 럭키넘버 18번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겐 아주 좋은 시기였습니다. 선생은 제가 아주 운이 좋은 시기라 요즘 저와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한민경 선생은 조셉 캠벨 교수의 '영웅 이야기'나 퀴리 부인의 일화는 물론 1차 세계대전  즈음 신비주의를 이끌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공든 탑, 태아, 낙법, 줄타기 등 메타포로 가득한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의 결말은 언제나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성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어떤 삶도 희망차다는 삶의 긍정적 메시지였습니다.


예정보다 깊은 밤까지 이어졌던 강의가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셨으나, 미적미적 그때까지 가방을 싸지 않던 김윤진 대표와 임소연 선생의 마음을 눈치챈 윤혜자 씨가 와인 테이블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강연을 지켜보며 뒤에서 순자 사진을 찍던 한 선생의 남편 유정식 작가까지 합세해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한 시 반이 되어 안녕을 고했습니다(윤혜자 : 시계를 보세요. 벌써 한 시 반이야!). 너무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다음 달엔 김호 선생의  『나는 이제 싫다고 말하기로 했다』를 읽고 저자를 모셔와 거절하는 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 역시 새해를 맞는 우리들의 자세를 위한 윤혜자 씨의 특별 기획임은 물론입니다. 다음 달까지 행사를 진행하고 소금책은 몇 달 쉬어갈 생각입니다. 바빴던 올해를 정리하고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동안 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민경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호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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