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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25. 2022

내년에도 여행자처럼 살자

성북동 소행성 크리스마스 일기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엔 괜히 설레기 마련이죠. 아무래도 놀고 싶은 마음이 '시즌' 핑계를 대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친한 배우 이승연(이름 때문에 늘 손해를 보지만 예명으로 바꾸지 않는 그의 기개를 높이 삽니다. 영화 《벌새》에서 박지후의 엄마로 나왔죠)과 성북동 '다노신'에서 만나 맛있는 요리와 술을 잔뜩 먹고 마신 뒤 양익준 감독이 하는 동네 카페 '빠뿅'에 가서 또 술을 마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빠뿅엔 평소 오던 단골손님들이 다 모여 있더군요. 저는 거기 온 각종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려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추태를 부리다가 술을 못 이겨 먼저 귀가하고 말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랫도리가 허전하더군요. 웬일인지 팬티를 벗고 자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리둥절한 상태로 아내에게 물어보니 "당신 팬티를 벗고 자더라."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루로 나가 보니 우리보다 늦게 들어와 마루에서 잤던 승연이 일어나 고양이 순자와 놀고 있었습니다. 승연이 저 대신 침대로 들어가 더 자는 사이 아내가 한 시간 반에 걸쳐 밥을 하고  활대구탕을 끓여 상을 차렸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밥과 국을 먹으면서 해장을 했습니다. 제가 어제 팬티를 벗고 잤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고 했더니 "오빠는 빤스를 어디 둔 거야?" "글쎄. 내가 빤스를 먹었나?" 같은 한심한 소리를 여배우와 주고받으며 밥을 먹었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승연은 마루에서 놀았고 저와 아내는 침대로 와서 다시 좀 자다가 산책을 나가기로 했습니다. 기력을 회복하려면 산책과 커피가 필요했고 그래야 승연도 좀 편하게 욕실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내일은 아침 일찍 혼자 사시는 노인들께 반찬 가져다 드리는 봉사를 하러 가야 하니 컨디션 조절이 필요합니다. 아내가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제가 마당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며 빈 박스를 접고 있는데 승연이 나오더니 " 잘 살고 있네. 봉사도 나가고 크리스마스에 둘이 산책을 나가다니. 여행처럼 사는 부부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행처럼 산다는 그의 말이 좋아서 하하 웃었습니다. 날은 확연히 풀렸고 하늘은 맑더군요. 성북동에서 커피가 제일 맛있는 집 '일상'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내년에 조금 쉬다가 다시 시작할 '소금책'에 어떤 자 작가들을 초대할까 의논했고 올해 봤던 공연 중에서 좋았던 작품들을 꼽아 보았습니다. 올해는 연극과 국악 공연을 꽤 많이 봤습니다. 냅킨에 메모를 하던 아내는 올해 봤던 연극 중 인상 깊었던 작품의 작가 겸 연출가에게 '선생님 작품을 내년에 책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케이크를 하나 주문해서 나눠 먹었습니다. 달달한 케이크를 먹으니 마음이 착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일상에서 한 잔 더 주는 묽은 커피(여기서는 한 잔 다 마시고 나면 직원이 내려주는 커피가 한 잔 더 나옵니다)를 마시고 '밀곳간'으로 가서 소금빵을 다섯 개 샀습니다. 빵집에도 사람이 정말 많더군요. 빵을 사며 여행처럼 산다는 승연의 말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어차피 인생 자체가 여행 아닌가. 그럴 바엔 여행자처럼 가볍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라는 생각을 하며 미소 지었습니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승연과 아내가 다른 얘기를 하는 바람에 까먹고 못했습니다. 승연이 가고 나서 어제 입었던 바지를 의자 위에 걸쳐 놨더니 거기서 팬티가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어제 바지를 벗다가 팬티까지 벗겨졌는데 그걸 몰랐던 것입니다. 술이 웬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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