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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06. 2023

나도 모르게 지나간 행운 또는 액운

옛 직장 동료에게 걸려온 전화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월요일 낮. 점심 약속 때문에 아내와 경복궁역 근처로 나갔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우리는 지인들에게 줄 간단한 선물을 사러 옷 가게에 들어갔다. 알록달록 파스텔 톤의 예쁜 목도리를 고르고 있는데 예전 광고회사 동료(나이는 후배)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를 물으려 메시지를 보내는 건데 생각난 김에 통화를 좀 해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반가웠다. 그 친구는 작가로 생활하는 내 소식을 잘 듣고 있다고 하며 광고를 떠난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잘 지내고 있느냐는 나의 의례적인 질문에 “김** 부장이 일하자고 해서 같이 했다가 아주 개피 봤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공교롭게 나도 얼마 전 김 부장이 프로젝트 하나 같이 하자고 해서 만났다가 좀 이상해서 그만뒀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와, 형. 안 하길 정말 잘했어요. 나 지금 정말 괴로워 죽겠어요."라고 말했다.


김 부장은 내가 쓴 책을 읽고 연락을 해왔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회장님의 책을 급하게 하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들어보니 못할 일도 아니었다. 금액도 제법 매력적이라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였다. 다만 책을 만드는 목적이 좀 애매했다. 나는 일단 회장님부터 빨리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김 부장은 책의 방향성과 컨셉을 정리한 페이퍼를 내밀며 일단 내용을 먼저 정리하는 게 순서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스부터 만나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책에 쓸 내용은 차후 순차적으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계약금을 줄 테니 먼저 계약부터 하자고 말도 그랬다. 어쩐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부터 불합리한 추궁과 마감날짜에 내몰리는 내 모습이 영상으로 그려졌다. 계약서는 나중에 쓰고 콘텐츠 팀과 미팅부터 잡자고 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던 김 부장은 나흘 후에야 연락을 해왔다.  갑자기 유럽 바이어가 와서 그 사람들 접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계약서 얘기를 꺼내길래 나는 집필료를 두 배로 올렸고 김 부장은 연락을 끊었다.


감기몸살 기운이 있길래 1월 2일 월요일 오전에 병원에 갔더니 코로나 19 확진이었다. 그날부터 일주일간 집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열이 오르고 가래가 생겨 목소리가 안 나오기도 했지만 특별히 견디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나 때문에 아내가 덩달아 고생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밤중에 마루에 나와 소설책이나 읽다 보면 두려움이 몰려왔다. 모바일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그 계약금 생각이 났다. 그걸 받았으면 이렇게 가슴 졸이고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급해도 아닌 건 아니다. 내가 떳떳하고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그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맞다. 올해도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곧 기운을 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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