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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28. 2022

슬픈 운명과 사랑의 로드 무비

《본즈 앤 올》리뷰

흔히 사람을 먹는 영화라고 하면 공포나 괴기물이 떠오르니 주인공도 당연히 괴력이나 초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뛰어난 킬러였지만 늘 생존을 위해 허겁지겁 뛰어다니기만 했던 제이슨 본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들도 자신에게 닥친 운명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젊은이들일 뿐이죠. 영화를 보기 전에 제가 들은 건 '식인' 즉, 사람을 먹는 이터(eater) 이야기라는 것과 그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만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티모시 살라메 작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첫 시퀀스 이후 드는 생각은 '아, 얘네들 앞으로 살아가기 참 힘들겠구나'라는 안쓰러움이었습니다. 리뷰를 쓰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누군가는 이들의 식인 행위에 '식성'이라는 단어를 붙였던데, 단연코 틀린 표현입니다. 매런이나 리에게 다른 인간을 먹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죠.


'완벽한 러브 스토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데이비드 카이가니치의 시나리오는 원작 소설의 배경을 클린턴 시대가 아니라 레이거니즘의 씁쓸한 그늘이 어린 1980년대 미국 중서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낡은 트럭을 타고 엄마를 찾아 광활한 미국 땅을 돌아다니는 매런과 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키스도 나누지만 단지 친구일 뿐이라고 애써 외면합니다. 사랑이라는 건 미래가 보이고 어딘가 정착해서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죠. 영화에 나오는 식인은 운명의 메타포입니다. 이들은 최대한 살인을 피하기 위해 '가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등의 원칙을 세워보기도 하지만 운명이 언제 사람 마음을 들어준 적이 있던가요.

매런 역의 테일러 러셀과 리 역의 티모시 살라메는 이 이상 이 역할을 잘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멋진 연기를 펼칩니다. 우연히 만나 매런에게 이터로서의 지식을 설파하다가 끝내 파멸로 몰고 가는 설리 역의 마크 라이런스의 뛰어난 연기엔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고요. 징그럽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셰익스피어 극 캐릭터처럼 장엄한 데가 있길래 찾아보니 정말로 셰익스피어 극의 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배우더군요. 그가 출연했다는 스필버그 감독의 《스파이 브리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이 영화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미국에서 만든 첫 번째 작품입니다. 메릴랜드·오하이오·네브래스카·인디애나·켄터키까지 미국 중서부의 다섯 개 주를 돌아다니는 로드 무비 형식의 이 영화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보편적 행복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을 그린 쓸쓸한 로맨스이면서 동시에 성장 영화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 성장이 사랑하는 사람을 뼈까지 다 먹어 치우는 '본즈 앤 올'이라 안타깝긴 하지만. 소재 때문에 관람을 망설이는 분에게 약간의 용기를 드리자면 이 영화는 식인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무섭거나 잔인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먹는 장면도 아주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견딜 만합니다. 무릎이 뚫린 청바지를 입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깡마른 티모시 살라메의 매력과 성실함이 당신의 주저를 씻어줄 것입니다.  《본즈 앤 올》은 설정에 비해 사실성이 뛰어난 영화입니다. 음악 또한 너무나 좋습니다. 영화 초반에 티모시 살라메가 '분장을 하지 않은 시절의 그룹 키스(KISS)'의 곡을 따라 부르는 장면을 놓치지 마십시오. 슬픈 운명을 타고 난 아웃사이더들에게도 놀이공원처럼 행복한 순간은 있습니다. 인간이 해야 하는 건 결국 사랑밖에 더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사라지기 전에 꼭 극장에서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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