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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31. 2022

연극에 관한 네 개의 질문

체홉 4대장막극 번안 프로젝트 : 종로 갈매기 쯔루하시 세자매 능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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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하냐는 질문이 있겠다. 김연민이라는 연출가가 9년에 걸쳐 미련하게 혼자 체홉의 작품들을 번역하고 등장인물들을 모두 한국인으로 바꾼 결과다. 모스크바가 서울과 종로로 바뀌고 육군 중령이 시인으로 바뀌는 등 하나하나 따져보면 개작에 가깝지만 그는 그저 '번안'일뿐이라고 얼굴을 붉힌다. 그 겸손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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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극을 보느냐는 질문이 있겠다. 그 대답은 어제 낮 열두 시 삼삽 분쯤 안톤 체홉의 장막극 네 개를 한꺼번에 공연하는 대학로의 한 극장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짝 들은 것 같다. '왜 연극을 보러 다니냐'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젊은 여성 관객은 "우리 같은 이과 출신들은 상상도 못 할 세계가 펼쳐져."라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극장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그 뒤는 듣지 못했지만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볼수록, 경험할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고 보고 싶은 게 많아지는 게 '연극'이라는 스토리텔링의 세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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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체홉이냐는 질문이 있겠다. 안톤 체홉이 러시아에서 《갈매기》를 공연한 게 1896년이다. 100여 년 전 희극으로 러시아 사람들을 웃겼던 체홉은 이제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울린다. 그의 극본 속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꾼다. 하지만 잔인한 체홉은 관객의 입맛에 맞게 인위적으로 현실을 조작할 생각이 없다. 천재 작가를 꿈꾸던 젊은이는 자살하고 결혼을 약속한 남자도 달리는 지하철에 몸을 던진다. 세자매는 모스크바로도 서울로도 가지 못하고 바냐 아저씨도 능길삼촌도 삶이 피곤하다며 운다. 벚꽃동산이 팔린 것처럼 연꽃정원도 팔린다. 19세기말에 탄생한 체홉의 '객관적 리얼리즘'은 2022년 연말에 서울에 와서 핏빛 웃음꽃을 활짝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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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에서 얻은 게 뭐냐는 질문엔 김보나 배우라고 대답하겠다. 일제 강점기 경성 최고의 여배우로 나올 때나 일본의 쯔루하시 시장에서 김치전을 파는 첫째 딸로 나올 때나 김보나 배우의 얼굴과 표정과 발성, 피지컬은 빛이 났다. 물론 그 혼자서 빛날 리가 없다. 김벼리, 김은주, 김예림, 강애심, 김세환,  윤성원, 김보정, 윤소희, 김준우 등 명배우들이 함께 했기에 날 수 있었던 빛이었다. 연꽃정원에서 "엄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좋았어요."라는 대사와 함께 껴안고 울던 강애심 선생과 김보정 배우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나는 맨 마지막 장면에 멜빵할아버지로 나온 김동호 선생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전문 배우가 아니라서 더 애틋하고 좋았다. 그는 김세환 배우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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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나서 강애심 배우를 기다려 인사를 드렸다. 아내가 어떤 인연으로 집에서 밥을 한 번 해드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너무 반가워하셨다. 마침 계단에서 팬들에게 인사를 하던 김세환 배우에게도 알은체를 했다. 그가 알아보든 말든 그냥 연극 잘 보았다고 인사를 했다. 아내가 "내년에 LG아트센터에서 봬요."라고 마지막 멘트를 던졌다. 배우 이승연의 말대로 이 정도면 아내는 관객이 아니라 관계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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