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당신께
박연준 시인이 『쓰는 기분』에서 '모든 글은 후일담이다'라고 쓴 구절을 읽으며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렇죠. 작가들이 쓰는 것 중에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쓰는 글은 없죠. 오로지 과거를 쓸 뿐입니다. 그렇다고 과거를 정확하게 다 기억하고 쓰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억력이라는 게 형편없어서 과거는 늘 쓰는 사람에 의해 왜곡되거나 과장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로 인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의미들입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곱씹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들이 소중해지고 어제 점심시간에 직장 동료와 나눈 대화에서도 의외의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건 다 후일담이 가진 힘입니다. 물론 그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의미와 가치는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게 저의 경험담을 나눠 드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험이라는 게 뭐 대단할 건 없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읽어온 책과 썼던 글 들, 그리고 광고회사를 다니며 술집을 전전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에피소드들이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테니까요. 사소한 이야기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성공담이 아니라도 상관없고요. 어쩌면 이야기를 늘어놓는 저 자신조차도 그게 성공담인지 실패담인지 모르고 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내가 도시락을 싸 들고 회사 근처로 왔길래 ATM기에 가서 십만 원을 찾아 오만 원씩 나눠 가졌다. 아내가 좋아했다.'라고 썼더니 도대체 그 글을 쓴 의도가 뭐냐고 묻는 독자도 있었으니까요(진짜 강연장에 와서 그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고 "글쎄요. 그냥 쓰고 싶어서 쓴 건데. 이상하세요?"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이라는 게 늘 명징한 의도와 효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재밌는 건 그분처럼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분이 있는가 하면 그 글을 콕 집어 좋다고 하는 분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와 ATM기'라는 짧은 글은 저의 첫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에서 '별똥별'이라는 글과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고 사랑받았던 꼭지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일입니다. 책상 앞에 앉자마자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 글을 쓰면서도 저는 중간에 첫 줄부터 다시 읽어보고 '이렇게 시작하는 게 정말 괜찮을까?' '이런 예가 적절하겠다' ‘이 문장보다 이 문장이 낫지 않아?'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렸으니까요. 저는 당신이 글을 쓰며 나누는 스스로의 대화 속에 제가 자주 등장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나눠드린 경험담이나 후일담이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으니까요. 당신이 글을 쓰는 순간 세상이 아주 조금 변한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글 쓰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