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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14. 2023

순자 엄마는 정지아 작가님의 딸이었다

구례에서 만난 정지아 작가님 이야기

우리 집에 사는 고양이 순자의 고향은 전라남도 구례다. 거기 사는 소설가 정지아 작가가 기르는 스코티시폴드 중 혼자만 귀가 접히지 않은 '스코티시 스트레이트'로 태어난 것이다. 아내는 가끔씩 순자의 사진을 찍어 작가님에게 보내곤 하며 안부를 전했는데 지난겨울 대학로에서 열린 『아버지의 해방일지』 북토크에서  드디어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대뜸 술을 한 번 마시자고 청했고 선생은 구례로 한 번 내려오라고 해서 즉석에서 여행 일정을 잡았다. 그 일정이 지난 일요일 월요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KTX를 타고 구례구역(구례의 입구라서 구례구였다)으로 가서 택시를 탈 생각이었으나 운 좋게도 운행 시간표가 너무 잘 맞는 바람에 버스를 갈아타고 선생의 집으로 갔다. 아침 일찍 출발하긴 하지만 구례에서 좀 놀다가 서너 시쯤 찾아뵙겠다고 한 손님들이 결과적으로 두 시경에 들이닥쳤으니 좀 민망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아내와 나를 반갑게 맞으며 바로 다금바리회, 멍게, 새조개, 갓김치,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 등 푸짐한 안주를 내며 술상을 차렸다. 술은 윤혜자가 내추럴 와인을 몇 병 미리 보내 드렸지만 이 날은 독하지 않은 사케를 마시기로 했다.  우리는 순자의 부모인 그냥이, 저냥이는 물론 순자보다 먼저 태어난 '애플이'와 '구글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선생이 오은 시인과 함께 한 대학로 북토크에서 "고양이 이름 짓기도 귀찮아 그냥이, 저냥이라고 불렀는데 새끼들이 태어나자 이제는 좀 자본주의적으로 살아봐야지 하고 애플이와 구글이라고 지었다'라고 하던 게 생각나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네 마리는 각각 다 다른데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순자의 엄마인 그냥이는 털 색깔만 크림색이지 얼굴과 목소리가 순자와 거의 똑같았다. 아내는 "순자의 부모를 만나러 오면서 정작 순자는 안 데려왔어요."라며 웃었다.   


다금바리회와 삼겹살을 곁들인 술자리에서 안주를 폭풍 흡입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내는 페스코 베지터리안이니 고기를 안 먹는 게 당연했지만 정지아 작가도 정작 고기와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면을 좋아하는 식성 얘기가 나와 구포국수, 혜화칼국수  등 성북동의 국숫집 이야기를 좀 했다. 술을 마시며 술 얘기가 빠질 수 없었다. 빨치산의 딸이지만  조니워커 블루 등 위스키를 좋아하는 정지아 선생을 위해 후배나 제자들이 외국에 나가면 사 오곤 했는데 코로나 19 이후엔 남대문시장으로 구입처를 바꿨다가 이제는 그것도 뜸해졌다고 한다. 내가 권여선 작가의 『안녕 주정뱅이』 얘기를 했더니 선생이 권 작가가 술을 정말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며 웃었다. 선생도 남 못지않게 술을 좋아하는지라 술에 관한 책을 한 권 내기로 했단다.  우리 부부가 일본 만화책  『음주가무 연구소』와 드라마 《술꾼도시처녀들》얘기를 했더니 "어이쿠, 책 제목을 바꿔야겠네."라고 해서 웃었다.


세 시부터 열두 시까지 천천히 이어진 술자리는 결국은 문학 얘기였다. 조해진, 정보라, 강화길, 정세랑, 최은영 등 요즘 인기 있는 젊은 소설가들 얘기를 했고 문단에서 경험했던 선배들의 숨은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선생은 삶이 작품에 잘 투영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론으로만 배워 재주만 승한 경우가 있다고 하며, 어떤 상황이든 타인의 입장까지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소설은 좋지 않음을 역설했다.  나도 기계 인간처럼 맡은 역할만 충실히 소화하는 캐릭터는 정말 매력이 없다며 맞장구를 쳤다. 페미니즘 얘기도 했다. 페미니즘은 당연한 것이지만 넓은 시야와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페미니즘 자체만 강조하면 교조적인 꼰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날카로움이 놀라웠다.  


선생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당시 금서였던  『빨치산의 딸』이 국가보안법에 걸려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 '남부군'의 이태 선생이 반성문을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 준 이야기는 너무 흥미진진했고,  젊은 날 술에 취해 택시인 줄 알고 잡아 탄 자가용에서 운 좋게도 신사를 만나 집까지 잘 갔고 거기서 운동권 겸 수배자임을 밝힌 이야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나중에 참여정부의 고위 인사가 된 이야기도 마치 소설 같았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 회장님의 명함을 받고도 그냥 버려서 '복을 찼다'는 얘기를 들은 이야기, 재력가의 초대로 호텔에 가서 수백만 원짜리 최고급 회를 먹은 이야기도 웃겼지만 조선학교 출신 일본 야쿠자를 인터뷰한 이야기는 정말 배꼽을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선생은 "예전에 문창과 오는 애들은 그래도 전교 1등을 한 번은 해본 애들 같았는데 이젠 다들 의욕이 너무 없다"라며 달라진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지금 꼰대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어렸을 때는 그래도 세상에 옳은 게 뭔지 기본적인 예의가 뭔지 정도는 있었는데 그런 기준이 사라지고 나니 간절히 원하는 것도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슬픈 일이었다. 그나마 제자 중 '한 번만 빨아도 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쓴 엉뚱한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서글프게 웃었다.


너무 유명한 사람 얘기이거나 너무 사적인 이야기라서 밝힐 수 없는 사연들이 술잔과 밥그릇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고 고양이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냥이는 츄르를 안 먹고 닭가슴살을 좋아하는 고양이었고 저냥이는 눈치 없이 아무 때나 들이대는 좋은 성격이라 입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까칠한 그냥이 사이에서 순자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고양이 네 마리의 밥을 식성대로 다 챙겨주고 어머니 식사도 하루 두 번 새로 밥을 해서 차려 드리는 강행군을 매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에게는 설거지도 시키지 않는 사람이라 우리는 베짱이처럼 먹고 마시기만 해야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마신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다가 손님방으로 들어가 잤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있는 개 '치타'와 놀다가 다시 들어와 '창작과 비평'에 실린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아침 역시 선생이 준비한 시래깃국과 굴비구이가 너무 맛있는 식탁이었다. 선생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6부작 드라마로 만들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내 책의 드라마 진행 소식을 물었다. 우리는 소설의 아버지 역으로 이성민 배우가 캐스팅되면 너무 좋겠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경험 상 캐스팅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스케줄과 운이 다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아침까지 배불리 먹고 선생이 불러준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갔더니 택시 운전사가 택시비를 안 받았다. 선생이 이미 다 냈다는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동시패션으로 몰려왔다.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 장 구경을 좀 하다가 대파 한 단과 냉이, 달래 등을 사서 쇼핑가방에 넣고 서울로 올라왔다. 입춘부터 시작한 금주 기간에 음주티켓 세 장을 쓰기로 했는데 구례에서 한 장을 썼다. 원 없이 먹고 마신 일박이일이었다. 월요일 저녁에 서울에 올라와 뭐 빠트리고 온 건 없나 가방을 뒤져 보니 아이폰 충전하는 젠더를 놓고 오고 말았다. 아아, 그게 최신형이라 급속 충전이 되는 건데. 정지아 선생은 아이폰 유저도 아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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