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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18. 2023

평론가·작가와 함께 보낸 음주티켓 사용기

성북동 소행성에 온 손님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저기 진행자 중 한 명이 며칠 후 우리 집에 온단 말이지...' 입춘부터 3개월 간 금주를 선언한 아내와 나는 그 기간에도 술을 마실 수 있는 티켓을 세 장씩 마련했는데  나는 이미 두 장을 써서 한 장 남았고 아내는 두 장의 여유가 있었다. 아내가 음주티켓을 쓰기로 한 상대는 영화평론가이자 작가인 김태훈 선생이었다. 아내는 예전에 무슨 일로 만난 적이 있고 나는 초면인데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오고 싶다고  했기에 초대를 한 것이다. 원래는 김태훈 선생 한 분만 모시려다가 이기원 작가와 친하다는 걸 알게 된 아내가 두 사람을 함께 초대했다. 약속한 금요일 저녁 5시에 거의 1분 차이로 두 사람이 성북동 소행성에 도착했다.


우리는 김태훈 선생의 손에 들린 술병을 보고 환호작약했다. 좋아하는 조니워커 블루였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책쓰기 워크숍 민하 쌤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리즐링을 꺼내자 김태훈 선생이 화이트 와인을 좋아한다며 기뻐했다. 이기원 작가는 내 책상에 있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을 보더니 반가워했다. 며칠 전 내게 추천을 했는데 내가 금세 사서 읽고 있으니 추천자로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김태훈 선생도 그 책을 읽었는지 조너선 갓셜 정말 글 잘 쓴다고 감탄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인 줄 알았더니 인문학적인 접근이 대단한 책이었다고 하면서.


작가와 평론가라서 그런지 책과 영화, 드라마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며칠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자 대신 스툴을 가져다 놓는 바람에 이동진·김태훈 두 사람 모두 허리가 아파 혼났다는 얘기를 하며 웃었다. 김태훈 선생은 다방면으로 박식한 것은 물론 취미도 다양했다. 서핑을 좋아해 요즘 양양으로 파도타기를 하러 다닌다고 했고 비교적 늦게  커피 맛을 알게 되어 지금 로스팅을 하러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요 며칠은 아카데미 시상식 준비하느라 다른 일을 하나도 못하고 지냈다고 한다. 이기원 작가가 《하얀 거탑》 극본 쓸 때 얘기가 너무 재밌었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특히 방송·콘텐츠 분야는 사기꾼도 많고 이상한 사람도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짜 극작가' 얘기는 정말 황당했다. 촬영장에서 극작가인 척함으로써 다른 프로젝트의 드라마 작가로 계약까지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극본을 제대로 썼을 리가 만무하지만. 도박에 대한 얘기도 나왔고 중독에 대한 얘기도 마구 쏟아졌다.


아내가 만든 삶은 감자와 문어 요리는 살짝 실패한 것 같다는 자평에도 불구하고 너무 맛이 좋았다. 김태훈 선생은 매너가 좋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달변인 거야 예전부터 알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까지 다 챙기는 세심함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가 한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TV 보는 것 같아!"라고 말해서 모두 웃었다. 정말 TV 토크쇼에서 패널이 나와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이기원 작가가 요즘 쓰고 있는 드라마 얘기도 했고 각자의 집안 얘기도 했다. 김태훈 선생이 요즘 아내가 쓴 책을 재밌게 읽고 있다고 해서 새삼 고마워하기도 했다.


술을 무척 많이 마셨다. 리즐링과 조니워커를 다 마시고 이기원 작가가 가져온 삼해소주와 집에 있던 화요 프리미엄까지 네 병을 비웠다. 네 사람이 어떻게 헤어졌는지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아침에 확인을 해보니 무척 즐거웠고 무사히 헤어졌다는 기억만 나눠 가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김태훈 선생이 한옥이 너무 예쁘다며 또 놀러 오고 싶다고 해서 당연히 다시 모이자고 했다. 숙취로 하루 종일 고생을 한 아내는 "이렇게 힘들면서 우리는 왜 맨날 술을 마시는 걸까?"라며 웃었다. 아마 힘들 일 중에 가장 즐거운 게 술 마시는 거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은 정말 달았다. 역시 술은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것보다는 가끔의 폭주가 최고다. 마지막 음주 티켓은 이렇게 썼다. 이제 5월 5일까지 나는 완전 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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