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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20. 2023

베스트셀러 중 한 권만 먼저 추천해 달라고 하면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 리뷰

맨 처음 김초엽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인식한 것은 한 SF 공모전에서 대상과 가작을 함께 수상한 공학도 출신의 작가가 등장했다는 뉴스를 통해서였다. 그 작품들은 「관내 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었는데 나는 특히 '관내 분실'이 좋았다. 죽은 사람의 기억을 도서관에 보관한다는 아이디어야 이미 필립 K. 딕을 비롯한 외국 소설가들의 작품에도 등장한 바 있지만 김초엽은 거기에 국문과를 다녔던 엄마가 숨겼던 꿈을 반추하는 플롯과 주인공이 임신을 함으로써 엄마와 마음과 이어진다는 상황 등을 보탰다.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그 이후로 그는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단편집을 냈고 초단편집, 중편, 김원영 변호사와 공저로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논픽션까지 냈다. 김초엽의 시대가 열렸다.


관건은 SF를 넘어 일반 소설계에도 새 바람을 일으킨 젊은 작가 김초엽이 과연 장편도 잘 쓸 수 있을까, 였는데 그건 높은 판매 부수가 답이 되어 주었다. SF를 좋아하는 데다가 배명훈과 김초엽을 특히 좋아해서 자칭타칭 '김초엽 전문가'로고 불리는 북튜버 김겨울은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단편을 잘 쓰는 작가가 장편도 잘 쓰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김초엽은 명백히 전자입니다." 잘 쓴다는 얘기다.


미뤄두었던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며칠 걸려 다 읽었다. 며칠이나 걸린 건 개인적으로 바쁜 일도 많았지만 메모를 하면서 읽느라 더 그랬다. 다른 책도 그렇지만 SF는 설정이 강력해서 초기에 메모할 것들이 많다. 자가 증식하는 더스트라는 마이크로 로봇이 지구를 멸망시킬 지경으로 세상을 뒤덮었을 때 모스바나라는 덩굴식물이 나타나 위기에서 인류를 구한다는 이 이야기는 천선란의  『나인』처럼 식물이 중심에 선 이야기라 색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김초엽은 소설을 쓰기 전 곰팡이나 식물 같은 '비인간적 존재'가 인간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아마라와 나오미 자매도 나오고 아영이나 지수, 레이첼도 등장하지만 결국은 식물인 모스바나가 주인공이다.  


과학도 출신이라 그런 건 아니겠지만 김초엽의 문체는 정말 진지하다. 유머나 자조도 없고 섹스나 연애가 끼어들 틈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지수와 레이첼의 연애 감정이 등장할 때 조금 더 꽁냥꽁냥했으면 하는 마음도 아] 있었으나 김초엽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런 우직하고 고전적인 면모 때문에 더 끌렸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소설은 프림빌리지라는 과거의 장소와 현대의 더스트 생태 연구소,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까지 광활하게 오가며 뿌린 단서들을 마지막에 기가 막히게 짜 맞추는 신공을 발휘한다. "우리만이 아니었군요. 모두가 잊지 않았어요." "맞아요. 당신들이 약속을 지켰고 세계를 구한 거예요."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서로의 능력과 마음을 모아 공동체를 살리는 흐뭇한 이야기다. 게다가 연구원인 아영 윤재 등은 물론 랑가노의 마녀들, 연애 감정을 주고받는 지수와 레이첼까지 모두 여성 연대의 이야기다. 소설의 성비가 이렇게 된 것은 남성이 등장할 새가 없었던 게 아니라 중요한 일에 남녀 구별을 하지 않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10만 부 판매 기념 한정판 판매 소식이 들려온 게 작년이고 스튜디오 드래곤에서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했다는 얘기도 뉴스에 나왔으니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본보기로도 손색이 없다.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가 있을 때 한 권만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우선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곧 나올 드라마를 예습하자는 의미도 약간은 있지만 그보다는 구성의 탄탄함과 지구 위 존재들의 종을 보는 진보적 시각까지 모두 갖춘 소설이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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