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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28. 2023

오늘 아침 박연준의 책을 읽는 방법

산문집『고요한 포옹』 독중감


소설과 에세이는 쓰는 순서도 다르지만 읽는 방법 역시 차이가 있다. 나는 에세이 한 권을 읽을 때 맨 처음부터 읽지 않고 아무 데나 중간을 펴서 한두 편을 읽은 다음에 프롤로그를 읽는 편이다. 일단 작가가 책을 시작할 때 프롤로그부터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설사 먼저 썼더라도 본문을 다 쓴 다음엔 반드시 고치게 마련이다) 본문 몇 편으로 간(?)을 본 뒤에 전체를 읽기 시작하면 작가나 편집자의 의도가 더 선명하게 읽히는 기분이다. 뭐, 이건 나만의 독서 기벽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란다.


박연준 시인의 에세이 『고요한 포옹』을 그제 대학로 동양서림에 갔다가 샀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 아침 다른 일을 하려다가 문득 책을 손에 잡고 아무 데나 펼쳤다. 작가가 쓴 글 중 하나를 무작위로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해서 읽은 것은 SNS에 글을 올리는 것에 대한 생각, 또는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 「보여도 될 것만 올립니다」였다. 여행을 떠날 때도 남이 SNS에 올린 것을 보고 계획을 세우는 삶, SNS를 보고 그 친구는 잘 지내는지 확인하는 삶...... 이제 누구도 우연에 기대 아무 정보 없이 헤매다 발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가장 좋은 건 언제나 우연이 데려다주었는데도.


두 번째 읽은 글은 「어른의 공부법」이라는 꼭지였다. 어른들은(작가는) 불안을 느끼며 사는데 그 이유는 달라지고 싶다는 열망이다. 사람은 변화를 꿈꾸는 존재다. 나 역시 지금보다 나은 존재, 사람, 상태가 되고 싶다. 박연준은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렸을 때와 달리 어른의 공부는 책상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어른들은 누워서도 공부하고 울면서도 공부한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공부를 하냐.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수시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 생명을 가진 것의 고통에 마음을 쓰는 사람, 변화를 도모하는 사람만이 계속 공부한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약간 뜨끔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이 계속 공부하게 한다'라는 대목을 읽으면서는 나의 글쓰기 교실에 오시는 분들도 다들 똑같은 질문을 품고 산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세상 모든 구도자들의 질문도 결국은 이것 하나로 수렴되지 않을까. 박연준은 '그러니 세상을 행해 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니, 쓴다.


두 꼭지를 읽고서야 비로소 프롤로그를 펼친다. 사실 프롤로그를 읽기 전까지는 책 제목이 왜 '고요한 포옹'인지 몰랐다. 책갈피 사이에 끼워 온 엽서를 보니 마음산책 편집자(또는 대표)는 '슬픔을 사랑으로 가만가만 끌어안는 몸짓'이라 표현해 놓았길래 아, 그렇게 마음의 좌표를 정하고 읽으면 더 정답게 읽히겠구나,라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프롤로그를 읽어보니 제목이 왜 이런지 더 명확해진다. 이 꼭지엔 '금이 간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에 박연준은 금이 간 건 그릇이든 우정이든 사랑이든 다 끝장이 난 것이라 여겼는데 이젠 냉장고 자석이나 빈티지 잔에 난 금을 다시 메워 사용하는 지혜와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나는 이 대목에서 킨츠키 기법으로 금 간 도자기를 수리해 주다가 우리와 인연을 맺은, 행복이가득한집 다니다 그만둔 효성 씨를 생각한다. 그녀는 그제도 우리 집에 왔었다). 아, 그래서 제목이 이렇게 되었구나. 그래서 박연준은 열정적 포개짐보다 고요한 포옹이 좋다고 하는구나. 자기만 생각하고 끌어안으면 금이 간 사람은 깨질 수도 있으니까.


두 꼭지를 읽고 프롤로그도 읽었으니 이제 책을 잠깐 던져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들춰보면 된다. 아내는 "시인들이 쓴 에세이는 처음 읽을 때는 쉽게 읽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읽으면 그때가 더 좋더라."라고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책에 대해 통하는 점이 많아서 다행이다. 어느덧 아침이 밝았고 아내가 일어나 화장실 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 순자는 불현듯 내게로 다가와 운다. 어서 엉덩이를 두드리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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