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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06. 2023

잘 만든 부조리극을 보는 쾌감

윤성호 작가의 연극《 누수공사》 리뷰

 

뭔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맞으면 '마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가끔 쓰게 되는데 어제 본 연극이 바로 그런 장르를 표방한 《 누수공사》였다. 방 안에서 혼자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며 마감에 쫓기고 있는 남자 정환에게 갑자기 집주인 여자가 들이닥친다. 아랫집에 물이 새기 때문에 오늘 누수공사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바빠서 지금은 곤란하다는 그 남자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누수공사 전문가 2인조가 방으로 들이닥친다. 물론 이 사람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와 설친다. 웃기는 건 신발을 신은 그들을 보더니 주인 여자도 벗어 놓았던 자기 신발을 찾아 신는다는 것이다. 이게 뭔 상황인가 기막혀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일회용 비옷을 입은 아래층 남자가 나타나 '평소에 재수가 없는 나 때문에 이 집에 누수가 생긴 것 같다. 죄송하다'라고 말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대뜸 나 같은 건 죽어버려야 한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누수공사를 하러 온 남녀 이인조는 대단히 과장된 억양과 몸짓으로 '원인'과 '본질'에 대해 계속 떠들지만 행동은 공허하기만 하다. 그러데도 집중을 해야 하니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 언어도단이요 적반하장이다. 그 와중에 집주인 여자는 이 집은 참 잘 지은 집인데 어쩌다가 누수가 발생했느냐고 한탄을 하고, 자신이 지난번에 들어와 뭔가 수리를 하고 청소를 하지 않은 건 정말 미안했다며 뒤늦게 물걸레질을 한다. 방 주인인 정환이 황당해하며 장판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하자 잠깐 장판으로 잡아당기기만 하면 된다며 도와 달라고 한다. 누수공사팀의 장광설과 주인아줌마의 장판 잡아당기기 시도가 뒤섞여 방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된다. 정환은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데 그 와중에 문이 열리더니 다음날 결혼을 한다는 옛 애인이 찾아와 "그때 너 왜 그랬어?"라며 따져서 부조리극의 정점을 찍는다.


《엔젤스 인 아마리카》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박용우의 연기는 명불허전이고 집주인 역 이지혜 배우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에게 계속 써클 가입을 권유하던 행복지원센터 팀장이다. 다들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기술자 역할을 맡은 하준호 배우도 프로필 사진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연극에서는 완전히 돌변해서 기괴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조수 격의 구선생 역할을 하는 김은희 배우도 같이 연극을 본 김기상 선생에 의하면 이전에 본 작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신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옛 애인 역을 맡은 문현정은 예쁘장하면서도 답답한 표정으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고등학교 때 명동엘칸토예술극장에서 보았던 피터 한트케의 언어유희극 《카스파》를 생각나게 하는 이 연극은 이렇게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에 황당해하며 웃다 보면 어느덧 슬퍼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해 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이 연극이 너무 닮아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어제 비가 오는 날이라 현장 예매 특별가 15,000원이었다. 여성 물리학자 김기상 선생은 동네에서 만나 우리와 함께 점심을 먹다가 아내의 즉석 제안에 응해 졸지에 이 연극을 보게 되었는데 ‘레이니 데이’ 덕분에 우리보다 싸게 연극을 본 것이다. 아내는 무엇보다 극본을 너무 잘 썼다며 윤성호 작가를 칭찬했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이 작품은 2017년에 초연되었는데 이젠 ‘네버엔딩플레이’에서 제작지원을 맡았으니 보다 많은 관객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일 이 연극을 한 번 더 보기로 했다.너무 웃기고 슬프고 황당한 내용에 극본과 연기, 연출 뭐하나 나무랄 데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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