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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09. 2023

부엌에서 세상을 짓고 사람을 만나는 사람, 양희경

『그냥 밥 먹자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몰라』리뷰

양희경 선생이 책을 냈다. 책을 몇 장 넘기다 나의 눈을 잡아 끄는 대목을 발견했다. 바로 '양희은의 청바지는 인간 세탁기 양희경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구절이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처럼' 싱그럽던 스무 살 시절의 양희은에게는 청바지가 한 벌뿐이어서 다음날 입고 나가 노래를 부르려면 매일 밤 청바지를 빨아야 했는데 그걸 동생 양희경이 했던 것이다. 그는 매일 바지를 빠는 것은 물론 겨울이면 아랫목에 깔아 말려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로 대변되던 70년대 젊음의 아이콘 양희은 뒤엔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몰랐을 일이다. 나는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이 구절이야말로 양희경 선생의 인성과 인생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고 생각한다. 유명인이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하고 평생 연기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밥 한 끼 나누는 걸 무엇보다 즐겁게 생각하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 양희경이라는 사람 말이다.


양희경은 우연한 기회에 음식 사진과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사람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세상으로 난 창문 하나를 더 열었다. 자신이 음식 해 먹는 얘기를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글과 사진들은 결국 출판사의 마음을 움직여 책으로 내게 만들었다. 이 책은 이병률 시인이 운영하는 출판사 달에서 나왔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시처럼 멋진 제목이 탄생했으리라.

 양희경은 연기자니까 인생에서 가장 즐겁게 여기는 것 역시 연기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언니가 권해서 들어간 서울예대(들어갈 때 이름은 서울예전)에서 수석 졸업을 할 정도였으니 언니 못지않은 그 '딴따라 DNA'를 누가 말리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에게는 연기 말고도 남다른 본능이 하나 더 장착되어 있었으니 바로 '집밥 본능'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밥을 먹고 자란 양희경은 평생 음식을 만들거나 밥상을 차리는 게 남들처럼 힘들거나 지겹지 않았고 오히려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속상한 일이 생기거나 대사가 안 외워지는 날이면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만들었다. 부엌일이라 부르지 않고 '부엌놀이'라 하는 이유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가장 기운이 난다. 작은 아들이 하루 6~8시간씩 죽어라 리딩 연습을 하고 들어온 날 얼굴에서 빛이 나는 걸 보고 양희경은 돈은 못 벌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만나는 게 행복임을 깨닫는다. 양희경도 그랬다. 부엌에 들어서면 힘이 났고 만든 음식을 사람들에게 먹이고 나면 "다 먹었으면 이제 집에 가."라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스스로가 좋았다. 그렇다고 연기 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송기원 소설가의 『늙은 창녀의 노래』를 읽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에 연극으로 올리게 된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이런 게 바로 예술가다. 다만 그에게는 연기보다 사람이 먼저였기에, 덩이들이 없었으면(선생은 자식들을 '덩이''라고 부른다) 그토록 열심히 살지도 않았을 테고, 그럼 오늘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부엌놀이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책 원고를 쓰고 있을 때 페이스북에 선생의 생일이라는 안내문이 뜨자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발동해서 짧은 동화를 하나 썼다. 신데렐라의 '말하는 거울'처럼 소년에게 세상의 지혜를 알려주는 거울을 하나 만들고는 그 이름을 양희경이라 우긴 것이다. 그 글을 선생의 담벼락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며 댓글을 달았는데, 웃기는 건 동화 잘 썼다고 하는 사람보다 그런 동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양희경 선생의 인격이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이 또한 양희경이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아내도 나도 단숨에 책을 읽었다. 교훈을 주려 노력하지도 않고 슴슴하고 담백하니 작가의 모습 그대로의 글들이다. 아직 먹어보지 못했지만 선생의 음식 역시 그러하리라 짐작하면서 일독을 권한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 자 한 자 양희경 작가가 꾹꾹 눌러쓴 흔적이 글자 사이사이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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