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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05. 2023

거의 완벽한 '벚꽃 동산'을 본 듯하다

국립극단 김광보 연출의 《벚꽃 동산》

두 개의 벚꽃동산을 며칠 사이로 보자고 한 건 아내의 아이디어였다. 하나는 작은 극장에서 올리는 작품이었는데 극장의 크기보다 걱정되는 건 주연배우의 나이가 너무 많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스물두 살 딸을 가진 라네스프카야 역을 60대 노인이 맡는다는 게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극 진행 중에 그녀의 오빠가 51세라고 나이를 밝히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공연은 기대 이하였다. 무대 동선이나 의상도 답답했고 연출이 배우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준 나머지 맡은 배역보다 배우들의 아우라가 더 많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또 한 편은 국립극단 김광보 연출의 《벚꽃 동산》이었다. 작년 《세인트 조앤》에서도 느꼈지만 김광보 예술감독의 연출은 클래식하면서도 지루함이 없다. 이번엔 넓은 무대 삼면을 유리벽으로 세우고 흰 커을 달았는데 황량하고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했고 영락한 귀족 집안의 정조가 안개처럼 뿌려진 무대였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발군이었다. 나는 백지원 배우를 TV 조연으로 많이 마주치다가 이병헌 감독의 《멜로가 체질》에서 메인 작가로 분했을 때부터 팬이 되었고 이번 류보비(라네프스카야) 역으로 홀딱 반하게 되었다. 자신의 낭비벽으로 전재산을 다 날리게 생겼는데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깨진 사랑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하는 라네프스카야의 허탈한 웃음과 눈물은 백지원이라는 배우를 만나 100여 년을 거슬러 오르는 공감력을 발휘한다. 같은 작가의 희곡 작품이라도 배우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얼마나 결이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물론 이 연극은 백지원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아냐 역을 맡은 이다혜 배우는 《한남의 광시곡》 때도 그렇게 잘하더니 이번에도 역시 사랑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니 배우뿐 아니라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로파힌 역의 이승주나 페챠 역의 윤성원도 언제나 믿음을 주는 연기를 펼친다.


라네프스카야와 아냐도 떠나고 벚꽃 동산의 새 주인이 된 로파힌도 떠난 쓸쓸한 '어린이방'에서 87세의 집사 피르스가 나타나 알 수 없는 한탄을 늘어놓는다. 때마침 내리는 눈은 하늘이 흘리는 회한의 눈물 같기도 하다. 객석은 만원이었고 사람들은 연극이 끝난 후에도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그만큼 무대가 주는 여운이 컸던 것이다. 함께 연극을 본 아내와 박재희 선생도 여운을 더 즐기고 싶었는지 명동의 한 맥주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마침 우리 옆 테이블의 여성 손님 두 분도 벚꽃동산 리플렛을 꺼내 놓고 연극 얘기를 하고 있어서 뭔가 비밀 집회에 온 느낌이었다. 아내는 방금 본 연극의 감동을 얘기하며 자신이 쓰는 돈 중 가장 잘한 게 오만 원 내고 국립극단의 연회원에 가입한 것이라고 했다. 박재희 선생이 "십만 원이라고 들었는데 오만 원밖에 안 돼요?"라고 놀라자 그녀는  이제 국립극단에 따로 후원이라도 해야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벚꽃 동산》은 안톤 체호프가 마지막으로 극본을 써서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우리는 백여 년 전에 안톤 체호프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썼을까 감탄하며 생맥주를 마셨다. 러시아 혁명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몰락한 귀족과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상인들, 그리고 지식인 계급이 뒤섞여 연출하는 이 드라마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생의 희망과 쓸쓸함이 들어 있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까지 리얼리즘의 걸작으로 전 세계 극장에서 계속 상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리뷰를 쓰려고 오늘 아침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다자이 오사무가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아 『사양』을 썼다고 한다. 그는 아예 벚꽃 동산과 비슷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그 소설을 썼노라 밝힐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안톤 체호프가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거의 전회 매진이지만 늘 그렇듯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예매 사이트를 뒤져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지 말자. '김광보'와 '국립극단'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 시즌에 예매 공지가 뜨면 망설임 없이 예매를 하면 된다. 좋은 작품을 보려면 그 정도 품을 들여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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