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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02. 2023

쓰지 않으면 사실도 없다는 간단한 진실

아니 에르노의 『젊은 남자』 리뷰

며칠 전 '서촌그책방'에서 하영남 대표에게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대뜸 아니 에르노의 소설 『젊은 남자』를 추천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책은 아주 얇았는데 너무 얇아서 그랬는지 한글 번역판 바로 뒤에 불어 원본이 붙어 있었고 부록으로 '아니 에르노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까지 달려왔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예루살렘 수상 소감문을 아주 재밌게 읽은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 하 대표의 안목을 신뢰하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책을 구입했다.


사생활은 물론 은밀한 성생활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적나라하게 쓰는 소설가에게 우리는 '솔직하고 용감한 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그 정도를 넘어선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걸 넘어 소설을 쓰기 위해 한 잔 하자며 젊은 남자 A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였다고 고백한다. 직접 겪은 일만 소설로 쓸 수 있으므로 연하남과의 사랑 이야기를 쓰려면 누군가를 직접 만나 사귀고 같이 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작가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데 한 술 더 뜨는 건 아니 에르노만이 아니다. 그녀가 쉰네 살 때 만나 열정을 불태운 가난한 대학생은 소설 속에서  A라는 대명사만으로 지칭되지만, 다 알다시피 그는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고 팬으로 매료되어 접근했던 필립 빌랭이라는 작가다. 그 역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그러나 에르노가 이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삶의 비밀들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수상 연설문에서 밝힌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어 자신의 출생 계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책을 읽고(어머니는 내가 뜨개질이나 바느질을 할 때보다 책을 읽을 때 더 기뻐하셨지요) 글을 썼다. 그녀가 책을 고를 때 학교의 추천 도서 목록에 따르기보다는 우연에 맡겼다는 대목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이었던 플로베르, 프루스트, 버지니아 울프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잘 쓰는 것'이나 아름다운 문장 등과 단절하기로 결심한다. 그러자 분노와 조롱, 심지어 상스러움마저 동반한 소란스러운 언어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찾아왔다.


이 짧지만 밀도 높은 문장으로 가득한 소설엔 정작 노골적인 성 묘사나 야한 장면이 없다. 다만 젊은 남자와의 연애를 통해 자신의 생애를 시기별로 관통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작가가 있다.  그녀가 이처럼 극도로 절제된 소위 '평평한 문체'를 쓰는 것은 문학이 뭔가 열정적이고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거부하기 때문이고 세련된 언어로 치장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배신하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겐 나르시시즘적인 것으로 간주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필요했으며 결국 '나는'은 개인을 넘어서고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철학에 다다른다.


그녀는 아들뻘 되는 스물세 살 젊은 남자와 다니면서 자신을 '근친상간으로 여기는'  사회의 눈과 맞서는데 이는 여성으로서의 욕망에 충실함과 동시에 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프랑스 사회의 기울어진 시각을 비판하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이 속한 계층을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한다(그는 나를 내 세대에서 빼내주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세대에 속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는 이런 노력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인간의 가치는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다'라고 믿는 사람들과 깊이 연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의 맨 앞에는 '내가 쓰지 않으면 사건들은 끝을 보지 못한다. 그저 일어난 일일 뿐.'이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나는 이 글을 마음속으로 이렇게 번역해 읽었다. "작가에게 쓰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같다. 쓴 것만이 사실이다." 아니 에르노가 끈질기게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작가들이  끊임없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 또한 이것이다. 글로 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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