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조희 - [보희와 녹양]
회사를 그만둔 후 일요일 밤마다 GCV 어플을 켜고 현재 상영작을 검색하는 버릇이 생겼다. 월조회, 즉 '월요일 아침에 조조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봐야 할 영화를 고르는 것이다. 어제도 같은 상황이었다. 술을 끊어서 이젠 낮이나 밤이나 무슨 요일이든 말똥말똥한 정신을 유지하게 된 우리 부부는 일찍 TV를 끄고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스마트폰 어플을 켰다. 아직은 [기생충]이 많은 극장을 차지하고 있고 [알라딘]이나 [맨 인 블랙 인터내셔널], [엑스맨 다크니스], [토이 스토리 4] 같은 블록버스터들이 새롭게 포진하고 있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월요일 아침에 보고 싶은 영화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요즘 가장 당기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체 게바라] 연작은 조조 상영이 아예 없고, [업사이드]나 [세상을 바꾼 변호인]도 있지만 왠지 끌리지 않았다. 포기할래. 월요일마다 꼭 영화를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폰을 이불 위에 집어던지며 아내에게 이번 주 월요일엔 영화를 보지 않고 놀겠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아내가 "여보, 맨 인 블랙 굳이 볼 필요 없다고 쓰여 있네."라고 하면서 인스타그램에서 영화평을 쓰는 팔로워를 하나 소개해 주었다. 'moviesta.hj' 최현진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올린 글들을 잠깐 둘러보니 영화 리뷰가 고르게 다 좋았다. 나는 그곳에서 이내 [보희와 녹양]이라는 독립 영화를 찾아내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거다! 예매 어플에서 제목만 보고 그냥 넘겼던 영화였는데 리뷰를 읽어보니 봐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었다. 나는 얼른 스마트폰으로 예매를 한 뒤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아내에게 방금 조조로 볼 영화가 생겼다고 자랑을 했다.
보희와 녹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베프로 지내온 열네 살 중학생들이다. 예상외로 보희가 남자다.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서 장국영의 이름이 보영이었던 것처럼. 보희는 미장원을 하는 엄마와 살고 있는 남학생인데 친구들이 자꾸 자기 이름 보희를 '보지'라고 바꿔 부르는 게 싫어서 개명을 할까 생각 중이다. 녹양은 할머니의 잔소리에 시달리는 게 세상에서 가장 큰 고민인 여학생이다. 공부는 시원치 않지만 성격이 활달해서 구김살이 없고 남자인 보희보다 뭐든지 적극적이다. 요즘은 스마트폰 동영상 카메라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다닌다. 언젠가는 짝은 것들을 편집해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이 영화는 우연한 기회에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보희가 녹양과 함께 엄마 몰래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그 와중에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배다른 누나와 그 남자 친구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아빠 찾기'라는 미션에 집중하느라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대신 나이는 어리지만 그 또래 치고는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이 살아가고 움직이는 순간순간들을 아주 자연스럽고 싱그럽게 그려낸다. 나는 여기 나오는 중학생들이 오직 떡볶이나 섹스에만 빠져 있는 단선적인 캐릭터가 아니라서 정말 기뻤다. 그리고 누나와 동거 중인 남자 친구도 좀 웃기긴 하지만 결코 오버하지 않으면서 잔잔한 에피소드들을 잘 소화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우선 보희와 녹양 역을 맡은 안지호 김주아 배우의 연기와 매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바에서 일하는 누나의 남자 친구도 왠지 정감이 가도록 서현우가 역할을 잘 소화했다. 뭔가 특별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은 없지만 시종일관 공감이 가면서 재미도 있다. 마지막에 녹양이 보희의 생일선물로 보내준 짧은 단편 다큐멘터리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아빠 역과 그 친구들의 연기가 좀 떨어지는 편인데 다행히 그 사람들은 잠깐 나온다.
오늘은 CGV압구정 안성기관에서 보았는데 엷게 풍기는 팝콘 냄새와 금방 청소한 게 느껴지는 텅 빈 극장 로비부터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산한 분위기가 좋았다. 뭐든지 하는 게 싫기만 했던 대학 시절에 나는 곧잘 수업을 제끼고 혼자 신촌이나 종로의 극장을 찾곤 했는데 그때 경험했던 평일 오전 극장의 한산한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엔 종로 피카디리 1958에서 [로켓맨]을 텅 빈 상영관에서 혼자 보았는데 오늘은 뒤늦게 들어온 관객이 있어서 총 네 명이 앉아서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오래전 전주영화제에서 보았던 [사이드카의 개]가 생각났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나왔던 배우가 출연했던 일본 영화였는데 그 작품을 보고 나왔을 때도 이렇게 흐뭇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배우들의 풋풋한 연기가 결코 심심하지 않았던 영화 [보희와 녹양] 덕분에 월요일이 싱그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