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Jun 20. 2019

금주일기 5

인사동 유목민 번개 편


<사람을 그냥 지나치기 싫어>


해마다 4월은 아픔을 그냥 지나치기 싫었고

5월은 꽃을 그냥 지나치기 싫었고

6월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기 싫어란  

제목으로 어떤 만남을 가져볼까 합니다.



청첩장 카피부터 번개 문구까지 카피라이터 출신들은 참 쓸 데 없는 데까지 정성을 들인다. 위 글은 후배이자 동료이자 페친인 조성표가 인사동 '유목민'이라는 술집에서 모이자는 번개를 치며 담벼락에 올린 글의 앞부분이다. 차분하게 모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은 사람이 그립고 술을 그립다는 얘기다. 난 이 글을 보지 못했는데 월요일 저녁에 성표가 페북 메시지를 따로 보내왔다. 요즘 내가 회사 안 다니는 걸 알고 번개 초대를 한 것이다. 맨날 보자 보자 말만 하지 말고 얼굴 한 번 디밀어 달라고 하면서 내 친구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최우근 작가도 나오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결혼기념일과 겹치는 바람에 성표의 아들 익희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던 터라 잘 됐다 생각하고 수요일에 보자는 답장을 보냈다.


안경점에 들러서 예전에 쓰던 안경을 손보고 조금 늦게 갔더니 모임 장소엔 이미 사람들이 거의 다 와 있었다. 스무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을 보니 아득해졌다. 우근이와 악수를 하고 고개를 돌리니 예전 회사 동료이자 현재 '토요워킹퀸 멤버'이기도 한 채윤정이 보여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저 좀 끼워주실래요,라고 인사를 하고 가운데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나는 당분간 술을 끊었으니 물을 마시겠다고 하고 물병을 내 앞에 챙겨 놓았다. 조성표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이분은 내 중학교 일 년 선배고 카피라이터 출신이고 영화나 드라마를 무척 좋아하시는 분인데, 한 번은 내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여자분들하고 세 시간 내내 드라마 얘기만 한 적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다들 신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길래, 다 정열이 뻗치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저 여기 앉아도 될까요?라고 말하며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옆에 앉은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앞에 있는 남자분이 아는 체를 한다. 누구더라, 아는 얼굴인데, 하고 있는데 '안단테 소요' 정종홍 씨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아, 그제야 누구인지를 깨달은 나는 미안해서 얼굴을 붉힌다. 정종홍 씨는 '밥상무비'라는 제목으로 음식과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분인데 아내가 지지난 해 겨울에 강의 기획을 해서 만났던 인물이다. 내가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며 실생활에서 이런 일이 잦다고 했더니 혹시 안면인식 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며 웃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친근하게 말을 거는 후배와 만났는데 누군지 몰라서 계속 겉도는 대화만 나누다가 헤어졌던 지옥 같았던 시간 이야기를 하며 어떤 날은 클라이언트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라 정말 심각하다고 한숨을 쉰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옆에 앉은 채윤정과 동갑이란다. 사람들이 둘이 어울린다고 부추기는 말을 듣고 내가 "둘이 잘 돼서 성복동소행성에 한 번 놀러 오세요."라고 초대를 한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라 그런 것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둘 다 서로를 괜찮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선남선녀들 아닌가.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정종홍 씨가 채윤정의 목소리가 배우 정유미를 닮지 않았느냐고 묻자 나는 기가 막혀서 채윤정을 쳐다보고 "야, 눈도 먼 것 같아. 잘해봐!"라고 외쳤다.


조성표를 중심으로 모인 페이스북 친구분들인데 인원이 많다 보니 직종 또한 다양했다. 최우근이나 정종홍 씨처럼 글을 쓰는 사람도 있었고 김인 씨 같은 회사원도 있었다.  정병근 시인처럼 시를 쓰는 이도  있었고 김지안 씨처럼 서양화를 전공한 뒤 지금은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면서 밤에는 사당역에서 소곱창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그밖에도 심리 상담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아마추어 역학자 등이 모여서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 빼놓고는 거의 다 아는 사이인 것 것처럼 정답게 대화를 나누길래 내가 술을 안 마셔서 그런가 했는데 일고 보니 서로 처음 보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당분간 술을 끊은 이유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마음대로 놀고 싶어서라고 얘기했더니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고 웃다가 나중엔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싸이월드 시절엔 '음주일기'를 연재한 적도 있었는데 제법 인기가 좋아서 지방에 사는 팬이 나를 만나러 올라온 적도 있다고 했더니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라며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십 년 넘게 산 남편에게 "우리 이제 한 오 년만 떨어져 살아보자"라고 했더니 남편이 화들짝 놀라더라는 어느 여자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연애 얘기를 한참 하기도 했다.


어떤 여자분이 자기는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이었고 그 후엔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못했노라고 얘기하면서 교회 얘기를 하실래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연애와 종교를 분리하세요. 신을 멀리 하세요. 연애는 오욕칠정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농담을 건네었더니 다들 맞다고 하며 웃었고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하는 나에게 '삶의 태도가 참 분명한 분'인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삶의 태도가 분명한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대책은 분명하게 세우지 못한 채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둔 나는 양심에 찔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막걸리 잔에 든 물만 연거푸 마셨다.



우리는 가게 바깥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주르륵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어서 화장실에 가려면 안채로 들어가야 했다. 내가 화장실에 갈 찬스를 노리며 안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냅다 나를 부르며(야, 너!) 반가운 척을 했다. 아, 저 사람이 누구더라. 가까이 가보니 관동대 '여섯줄 안에서'라는 노래패를 만든 그 옛날의 곽대원 형이었다. 대원이 형. 니가 이름이 뭐지? 성준이요. 그래. 성준이. 니가 도원이하고 동기냐? 아뇨. 두 기수 아래죠.  생각해 보닌 십여 년 전 신사동 간장게장골목에서 새벽 한 시쯤 우연히 만나고 처음이었다. 우리는 서로 명함을 꺼내는 척 주머니를 뒤졌으나 둘 다 명함이 없었다. 나는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명함이 없고 대원이 형은 늘 뭔가 문화운동을 하던 분이라 명함 따위는 필요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지난달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했더니 형은 이유도 묻지 않고 잘했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웃었다. 작년에 우리 동네 아리랑 문화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여섯줄 안에서' 동기 - 나는 뚜라미였지만 두 서클이 친해서 같은 학번들끼리는 동기처럼 지냈다 - 장석현을 동네 단골 식당에서 만났다고 했더니 매우 반가워하며 언제 셋이 같이 한 번 보자고 했다.


다시 자리로 와서 물을 마시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더니 우근이가 와서 "얘가 이렇게 말이 없는 아닌데... 너 왜 그래?"라고 물었고 나는 "술을 안 마셔서 그래."라고 대답했다. 우근이를 쳐다보니 걔도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너는 왜 그래?"라고 물으니 "담배를 안 피워서 그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근이는 요즘 금연 중인데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도통 글을 쓰지 못하고 지낸다고 했다. 나도 십여 년 전 담배를 끊을 때 너무 정신 집중이 안 돼서 진행하던 프로젝트 하나를 중단했던 기억이 나서 우근이를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서 소주를 한 잔 권하고 힘내라는 말을 건성으로 했더니 우근이는 으아아~ 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더니  술자리를 가로질러 마구 걸어 다니다가 다시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고 까르륵까르륵 웃으며 연신 술을 마셨다. 이 사람들은 왜 여기 모여서 이렇게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걸까. 아마도 외로워서 그러겠지.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해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우린 다 '론리 하트' 아니던가. 그렇다고 번개 장소에 나와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 만나면 행복하여도..."라고 초를 칠 수는 없는 일이고 해서 나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밑에 두었던 내 빨간 가방을 챙기고 오늘 만난 번개맨 번개우먼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성표가 와서 다시 내 어깨를 감싸며 "여러분, 이분 먼저 가신대요. 이분은 카피라이터인데 그보다는 성북동 소행성이라는 곳에서 까칠한 아내와 너무 재미있게 사는 거로 더 유명해요."라고 또 인사를 시켜줬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다. 열한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오늘 점심때 이 글을 쓰려고 메모를 하고 있는데 김인 씨가 어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거기엔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평일 저녁 페이스북 번개에 나가 물이나 마시며 속 없이 웃고 있는 중년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싱그러운 월요일 아침을 만들어준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