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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3. 2023

날카롭고 세련되게 구성된 여성들의 연대기

연극 《20세기 블루스》 리뷰


사진이란 무엇일까 나름 정의하려다 ‘흐르는 시간 중 어떤 순간을 포착해 압정으로 박아 벽에 붙여 놓는 것’ 정도는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해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은 사람들 이야기를 가끔 접하는데 그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연극 한 편을 보았다. 미국 극작가 수잔 밀러의 《20세기 블루스》는 젊은 시절 구치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매년 한 번씩 만나 사진을 찍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공한 사진작가 대니는 뉴욕현대미술관(MoMA) 개인 회고전에 다른 작품들을 다 제쳐놓고 이 친구들과 40년 간 꾸준히 찍어 온 사진들을 전시하고 싶어 한다.


마침 일 년 만에 다시 모여 사진을 찍는 네 친구는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격려하고(편집장에서 쫓겨난다고? 나는 네 기사가 없는 그 신문은 상상도 못 하겠어) 예전 비밀을 털어놓으며 깔깔대지만(그때 우리 둘이 현관에서 키스한 거 너희들은 모르지? 어머, 니네 진짜 그랬어?) 막상 대니가 회고전 얘기를 꺼내며 사진 공개를 요구하자 쉽게 동의하진 못한다.


처음엔 사생활을 공개하는 게 싫어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극이 진행됨에 따라 그보다 더 간절한 이유들이 있음이 밝혀진다. 바로 ‘계급’과 ‘상처‘의 드러남이다. 사진작가인 대니나 신문기자 맥은 비록 은퇴를 앞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60대 인텔리로서 사회적 지위나 자신감으로는 부족한 게 없다. 반면 수의사 개비는 남편과의 사별이 두려워 요즘 미리 혼자 호텔 생활을 해볼 정도로(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라 단지 혼자 지내는 연습을 위해!) 멘탈이 약하다. 그건 부동산을 보러 오는 고객들에게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성형수술을 고려하는 부동산중개업자 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예전에 돈이 없을 때 고객이 매물로 내놓은 집을 손님들에게 소개한 뒤 몰래 다시 돌아와 그 집 거실 바닥에서 한동안 잔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깜짝 놀란 친구들이 “그때 왜 얘기하지 않았니, 실?!”이러고 말하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있는 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이야기로 인해 누군가가 쉽게 ‘대상화’ 된다는 점이다. 철없던 스무 살 시절 구치소에서 잠깐 만났던 인연으로 네 사람은 친구가 된다.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술을 마시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도 추며 사진을 찍지만 그렇다고 지적·경제적으로 평등해지는 건 아니다. 맥이 마지막 기사를 전송하는 얘기를 한창 하는 과정에서 개비가 무심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언급하자 모두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호텔에서 그녀가 챙겨 온 어메니티를 보고 비웃던 친구들이다. “뭐야, 수의사는 맨날 해부학책만 보는 줄 알지?” 하고 개비가 웃어넘기지만 나는 연극을 통틀어 이 대사가 가장 인상 깊었다.


흔히 여성이 60세기 넘으면 섹스도 안 하고 모여서 완경 얘기만 할 것 같지만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디 그리 단순한가. 1970대에 불꽃 같은 젊은 시절을 보낸 미국 여성들의 삶을 탁월한 시선과 대사로 풀어놓은 수잔 밀러의 희곡은 연출가 부새롬의 감각에 의해 세련되게 무대를 채운다. 특히 마지막에 대니가 ‘TED’에 출연했을 때 함께 무대에 오른 친구들의 모습과 무대 벽면을 가득 채운 배우들 실제 젊었을 때 사진들은 텍스트와 실제의 경계를 지우기에 더욱 애틋하고 감동적이었다. 대니의 엄마로 출연한 이주실 선생은 귀여웠고 우미화 박명신 강명주 성여진 이지현 류원준 등 배우들의 연기력도 고르게 좋았다. 두산아트센터에서 6월 17일까지 상연한다. 《터칭 더 보이드》와 《보이지 않는 손》의 부새롬을 기억하는 분들은 놓치기 아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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