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Jun 10. 2023

국립창극단의 이유 있는 블록버스터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 리뷰

무대가 시작되기 전 막이 오르면 커다란 범선이 서 있고 그 망루 꼭대기에 선원이 하나 매달려 있다. 먼바다를 보는 듯 망원경을 눈에 댄 그의 위태위태한 모습에 관객들이 와~ 하고 환호하며 반가움의 박수를 보낸다. 여기는 지중해의 항구도시 베니스다. 아니, 사실은 장충동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다. 하지만 관객들의 마음은 이미 베니스로 가 있다. 오늘은 작년 시즌 티켓 오픈 때 산 표를 들고 '베니스의 상인들'을 만나러 왔으니까. 어제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을 보러 갔다. 셰익스피어 원작 희곡 『베니스의 상인』이 김은성 작가(연극 《빵야》 극본을 쓴 그 김은성 작가!)와 이성열 연출에 의해 '들'이라는 복수 어미가  하나 더 붙은 베니스의 상인들로 다시 태어났는데, 이는 안토니오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소상인 연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당연히 샤일록의 신분도 단순한 고리대금업자를 넘어 선박회사를 운영하는 대자본가로 바뀌었다.

무대는 크고 화려했다. 나는 유태평양이 샤일록 역을 맡으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막상 그 역을 맡은 김준수가 너무나 연기를 잘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표정이나 몸짓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안토니오 역의 유태평양도 워낙 연기를 잘하는 소리꾼이라 믿음이 갔다. 젊은 관객들 중엔 유태평양 덕분에 창극에 입문했다는 사람도 많다. 요즘 TV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즈' 크레즐 팀으로 출연해 주가를 올린 바사니오 역의 김수인도 싱그럽고 그라치아노 역 이광복 등 젊은 소리꾼들의 활약은 여전하다. 다만 포샤 역을 하기엔 민은경의 체격이 너무 왜소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역시 소리와 연기로 그런 걱정을 날려 주었다.


이런 스타들 말고도 서정금, 최호성 등 베테랑 소리꾼을 비롯한 극립창극단 단원 전원이 소상인 연대 또는 샤일록의 부하들로 출연하기에 아쉽지만 일요일까지 딱 4일간만 진행된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창극 매니아인 불교방송국 박광열 PD를 만났다. 그는 창극을 해오름 같은 대극장에서 상연한다는 것은 그만큼 규모나 대중성이 커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무대가 커지고 스타들이 등장하면서 음악이나 의상도 더 화려해졌다. 젊은 관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블록버스터 전략'으로 옮겨 탄 것이다. 덕분에 기존 창극 팬들은 공연을 더 보기 어려워졌다. 소문이 안 나길 바라는 관객들까지 생겼다고 한다. 박 PD는 요즘 무슨 심사를 앞두고 연일 야근을 하는 중인데 시간을 쪼개서 왔다고 한다. 공연이 끝나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이런 '찐팬'들 덕분에 공연계가 유지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장충동길을 걸으며 국립창극단도 고민이 많았겠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상업성 추구를 위해서는 블록버스터화가 너무 당연한데 그렇게 되면 티켓 값이 올라가고 그 티켓 값을 보상하기 위해서 극의 길이가 늘어나는 것이다.  솔직히 단촐하고 기름기 없는 예전 창극이 그립기도 하다. 지금은 음악도 동서양이 섞인 빅밴드이고 의상도 너무 화려해서 한복의 선은 아주 희미하게만 남아 있다. 무조건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가자는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연극이나 국악 등 공연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아내 덕에 나도 점점 공연 마니아가 되어 가고 있다. 어제 공연에서는 로비에서 자주 마주치는 인스타그램에서 'jade'가 들어가는 아이디를 쓰시는 분(성함은 모름)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아내가 "어제도 보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으니 "저는 창극은 전 회 다..."라며 웃으셨다. 공연 매니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네 번의 공연을 빠지지 않고 다 관람하신다니 그 팬심이 놀라울 뿐이다. 하긴 아내 옆에 앉았던 관객도 커튼 콜 때 스마트폰 두 대를 활용해 촬영을 하고 있었다며 그 분도 '회전문관객'이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우리는 참 소박한 관객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연 시작 전 로비에서 예수정 배우와 함께 서 있던 문예주 배우(@yejoo )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방송작가 여은영 선생(@eunyoungca)도 계신다고 해서 찾아 보았으니 만나지 못했다. 아, 극이 시작되기 전 우리 앞줄에 어린 여자애가 엄마와 함께 왔는데 너무 키가 작아 무대가 안 보일 것 같다며 아내가 보조 의자를 청해 좌석에 깔아 주었다. 극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으므로 어수선했고 안내 직원들이 바빠서인지 내가 손을 들고 서서 시위를 하는데도 좀처럼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손을 흔들었고 결국 직원 중 한 분이 와서 왜 그러냐 물었다. 나와 아내가 "보조석 좀!"이라고 하자 "아, 애 방석!" 하고는 얼른 쿠션을 가져다 주었다. 아이 엄마가 고맙다고 말씀하셔서 나도 괜히 으쓱해졌다. 정작 좋은 일을 한 아내는 무심하게 앉아 팜플릿을 뒤적이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캠핑을 하기 전에 해야할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