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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20. 2023

'먹을 수 있는 경제학'이 전해주는 맛있는 인문학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장하준이 예전에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소개한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을 먹여 살리는 수단으로는 무척 유용하다"는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의 냉소적 문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경제학을 내가 굳이 알아야 하나, 하는 회의에 젖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장하준의 생각은 다르다. 경제학은 한 나라의 경제에만 관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직접적으로.


세상사 모든 것은 태도의 문제다. 지난 몇십 년간 세계를 주름잡았던, 인간을 이기적 존재라 추정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한가한 생각을 하는 루저로 조롱받거나 뭔가 저의를 숨기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같은 이론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장하준은 만약 행동주의나 제도주의 경제학이 주류로 떠올랐다면 인간이 더 복잡한 동기를 가진 존재이고 이기적인 동기는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믿음이 생겨났을 것이라 말한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Edible Economics , 즉 먹을 수 있는 경제학이란 뜻이다.  어렵고 딱딱한 경제학을 음식 레시피처럼 풀어보겠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일 텐데, 막상 조금만 읽어보면 음식 이야기를 빌어 펼치는 인문학의 향연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대단히 친절하고 사려 깊은 인문학이다. 나는 아내가 '서촌그책방'에서 사 온 이 책을 동네 식당에서 펼쳐 '국수'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못 말리는 면 사랑>이라는 소제목 아래 우리나라가 즉석면, 그러니까 라면 등 인스턴트 국수 소비 1위 국가라는 얘기부터 나온다. 소면, 우동, 비빔면에 쫄면 얘기...... 물론 짜장면과 냉면 얘기도 빠질 수 없다. 저자가 워낙 역사적 지식도 많고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한 데다가 번역도 좋아(장하준 교수의 아내 김희정 번역가의  솜씨다)  책이 술술 넘어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면 사랑 다음 이야기는 이탈리아 파스타다. 책 뒤 표4에 보면 '음식이든 경제학이든 복잡한 아이디어를 쉽게 설명해 주는 진귀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는 단연 빼어난 작가다'라는 선데이 타임즈의 서평이 나오는데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게 이탈리아 사람들의 면 사랑 바로 다음엔 파스타의 '형태' 이야기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장하준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파스타 면을 디자인했다가 '파스타를 균등하게 익히는 문제' 때문에 결국 실패했던 디자이너 주지아로를 소개한다. 그는 폭스바겐, 마세라티 등 자동차를 백 가지도 넘게 디자인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우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포니 자동차의 디자이너로서였다. 포니는 그 디자인의 탁월함 덕분에 해외로 많이 수출되었던 최초의 국산 자동차다. 글은 자연스럽게 현대자동차 얘기로 넘어간다. 정주영·정세영 형제는 현대자동차가 자동차 선도 기업이 되는 건 '지옥에서 눈사람이 살아남을 확률'정도라 여겨지던 시대에 주지아로에게 첫 번째 차 디자인을 맡기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장하준은 이러한 결단 뒤에 헌신적이고 유능한 직원들의 노력(긴 근무 시간을 견디는)과  정보의 보호정책이 있었음을 잊지 않고 덧붙인다. 그래서 결론은? 국수에 집착하는 한국과 이탈리아 이야기를 살펴보면 현대 기업은 더 이상 개인의 비전이나 노력 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공적인 기업은 모두 집단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공교롭게도 국수는 혼자서는 만들지 못하는 집단의 음식이었다. 잔치국수처럼 축제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도대체 장하준은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요즘 연극이나 국악공연을 보러 공연장에 자주 다니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여자 화장실엔 길게 줄이 이어지고 남자 화장실은 한산한 편이다. 왜 그럴까? 화장실을 지을 때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을 같은 크기로 짓는다고 하면 공평하게 들릴지 모른다. 인구의 절반이 남성, 다른 절반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화장실에서 시간이 더 올래 걸리고 공간도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장실 크기가 같은 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다. 이 이야기가 이 책의 '닭고기' 부분에 나온다. 닭고기 챕터에 왜 화장실 얘기가 나오냐고? 그게 인문학책의 특징이고 아울러 이 책의 특징이기도 하니 궁금하신 분은 어서 이 책을 사서 펼쳐 보시기 바란다. 마늘부터 초콜릿까지 너무 재밌고 맛있어서 몇 시간이 후딱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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