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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15. 2023

이렇게 열심히 만들어 놓고 사흘밖에 안 한다고?

연극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전쟁의 비극은 흔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려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이분법에서 벗어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내의 조선인 군무원'이라는 독특한 포지션 때문에 소외당한 사람을 그려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게 바로 이 연극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923년생인 최영우는 고보(고등보통학교) 졸업을 앞두고 이버지의 권유로 일본군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자원한다. 전쟁 말기라 곧 대대적 징용이 있을 것 같은데 집안 삼형제 중 전쟁터에 나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고 또 감시원은 군인이 아니라 군무원이니까 직접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결정한 것이다. 더구나 2년간 근무를 하고 나면 쌓인 월급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은 꿈을 이룰 종잣돈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바람은 감시원 훈련소부터 박살이 나고 만다. 그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속 일본군은 물론 포로인 네덜란드 장교들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한다. 홧김에 한 번 때린 네덜란드 장교는 전쟁이 끝난 뒤 포로 신세가 된 그를 제네바협정 위반(포로 학대)으로 고발하고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일이지만 시대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 연극은 밀리의서재와 브런치가 주관한 브런치북 전자책 출판 프로젝트 수상작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원작이다. 그러니까 최영우는 실제 인물이고 이 이야기도 모두 사실인 것이다. 어렸지만 지적인 인물이었던 최영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육필 원고로 남겼고 그 원고를 바탕으로 손자가 쓴 르포르타주가 연극의 밑바탕이 된 것이다.  영상과 연극이 함께 만나는 '라이브필름 퍼포먼스'  형식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과 기술융합 지원사업에 선정된 이 작품은 요즘 가장 핫한 배우 김세환으로 인해 빛을 발한다. 할아버지와 손자 일인이역을 맡은 김세환은 눈물콧물을 쏟는 열연 속에서도 깔끔한 딕션으로 캐릭터의 딜레마를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 물론 그건 이정주, 고훈목, 조한, 임지영 등 다른 배우들이 디테일까지 챙기는 노력을 보여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특히 카메라로 미니어처를 찍어 영상으로 내보내는 장면에서의 타이밍과 치밀한 사운드 연출에 감탄했다. 필름과 연극의 만남이기에 무대 위엔 배우들 뿐 아니라 카메라를 든 스태프들과 미니어처를 연출하는 인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첫날이라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극의 진지함을 잃지 않고 끌고 간 연출과 연기의 조합은 박수 칠만 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만들어 놓고 사흘밖에 안 하다니."라며 같이 연극을 본 아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거 보면 연극하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내가 이런 연극에 출연해 대사를 몽땅 외웠다면 그거 잊는 게 아까워서라도 며칠 더 하자고 우겨볼 것 같다. 우디 앨런의 영화《브로드웨이를 쏴라》에 실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보스의 여자친구를 보호하던 보디가드 치치가 뒤늦게 연극에 재능을 발견하고 연극의 대사를 자꾸 고치니까 그녀가 " 대사 외우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그걸 고치면 어떡해요?"이라고 화를 낸다. 아무튼, 잠깐 얘기가 딴 데로 샜다. 지나치게 열심히 만든 이 연극이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딱 사흘 간만 상연한다.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참, 오늘 아는 사람을 세 팀이나 만났다. 다른 데서 만나도 반갑지만 이상하게 극장 로비에서 만나면 더 반갑다. 연극 보는 사람들끼리 이상한 공범의식 같은 게 생기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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