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Jul 21. 2023

결정적인 장면들

리뷰 노트에서 발견한 메모



1

스티븐 킹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온 곳은 출판사였다. 출판사 담당자는 지금 어디서 전화를 받는 거냐고 물었고 스티브는 부엌이라고 대답했다. 줄이 긴 전화기였다. 출판사 사장은 일단 의자를 가자고 와서 좀 앉은 뒤 통화를 하자고 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잠시 후 스티븐 킹은 자신의 소설 『캐리』의 영화 판권이 30만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의자에 앉지 않았다면 쓰러졌을 것이다.


2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가던 케빈 윌리엄슨은 모텔방 TV에서 나오는 재미없는 영화를 보다가 "야, 저딴 건 나도 쓰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공포영화 마니아였던 케빈은  제이미 리 커티스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안 돼. 제이미!"라고 소리를 지르는 고등학생들 얘기를 떠올렸다.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면 최소 5천 달러는 받을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의 생각은 틀렸다. 그가 쓴 《스크림》 시나리오는 할리우드를 떠돌다가 50만 달러에 팔렸기 때문이다.


3

2007년 7월 청소년문학상을 탄 정유정은 출판사에서 계약 문의도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청탁도 들어오길래 곧 꽃길이 깔릴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정신질환에 관한 이론 서적을 많이 읽었고 간호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정신병원에 가서 취재도 했지만 소설가로 살아갈 확신은 서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이 전화를 받아 "우리 세계일보 안 보는데요?"라고 하길래 전화기를 빼앗아 들어보니 세계일보 문화부였다. 그의 소설 『내 심장을 쏴라』가 세계문학상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정유정은 “당선… 된 건가요?"라고 되물으며 울먹였다.


4

오에 겐자부로는 식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전화를 받았다. "아, 예. 잘 됐군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 그에게 가족들이 무슨 전화였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방금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가족들은 정말 잘 되었다고 축하를 한 뒤 조용히 앉아 저녁을 마저 먹었다. 기뻤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 노트나 손에 집히는 걸 리뷰 노트로 쓰곤 한다. 오늘 아침에 예전 리뷰 노트에 해 놨던 메모를 발견한 김에 반가워서  정리를 해봤다. 스티븐 킹이나 케빈 윌리엄슨 이야기는 전부터 좋아했지만 이걸 쓰다가 오에 겐자부로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길래 그것까지 덧붙여 보았다. 아침부터 이런 에피소드들이 생각나는 걸 보니 나도 뭐가 극적인 순간을 맞고 싶은 모양이다. 일단 정신을 가다듬고 새 책 원고부터 부지런히 쓰자. 쓰는 놈에겐 못 당하는 법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먹을 수 있는 경제학'이 전해주는 맛있는 인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