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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11. 2023

125분이 지루하지 않았던 밀도 높은 번역극

연극《새빨간 스피도》리뷰

 


제목이 왜 '새빨간 스피도'일까 궁금했다. 알고 보니 수영선수 레이가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기만 하면 스포츠 브랜드 스피도와 계약을 맺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레이는 물론 그의 변호사이자 친형인 피터까지 그동안의 고생을 뒤로하고 돈방석에 앉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동료 선수 보이의 것이라 생각했던 약물이 사실은 레이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감독이 그 약물을 압수하자  불안해진 레이가 새 약물을 구하러 전 여자친구이자 스포츠 치료사인 리디아를 찾아가는 우를 범했다는 것.  2016년 오비상(Obie Awards) 극작 부문을 석권한  루카스 네이스의 희곡은 너무나 짱짱하다. 경기 전날 단 하룻밤이라는 시간과 수영장이라는 제한적인 공간 안에 네 사람의 이해관계는 물론 '경쟁사회'라는 본원적 딜레마까지 빈틈없이 엮어 놓았다.


125분간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된 연극이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한 건 연출의 힘도 크다. 이영석 연출은 마치 '연극이란 이런 거야'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수영장 타일과 레인을 형상화한 무대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고도 번역극 특유의 붕 뜨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완성도의 주역은 레이 역을 맡은 경지은 배우와 피터 역의 박종현 배우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경지은 배우는 여성이지만 남성 주인공 레이 역을 위해 머리를 짧게 깎고 두 시간 내내 빨간색 수영복을 입고 열연한다. 속물적 근성과 연민을 동시에 자아내는 박종현 배우의 성실한 연기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다.  연출자는 남성인 레이와 감독 역을 여배우들에게 맡기는 '젠더프리'를 감행함으로써 고정적 성 역할에서도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셰익스피어는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한낱 배우일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인생은 연극과 닮았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세상에서든 무대 위에서든 멋진 배우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밀도 높은 작품이었다. 아내는 극단 신작로의 작품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예매했다고 한다. 나는 2열 중간에 앉아서 보고 아내는 1열 오른쪽에서 따로 떨어져 봤는데 아내 옆에 앉은 여자가 남자친구 손을 너무 주무르는 바람에 아주 괴로웠다고 한다.  이렇게 재밌는 연극도 연애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웃었다. 8월 19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상연한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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