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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20. 2023

화장실에서 읽은 김개미의 시

김개미 시인의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일요일 아침, 뭔가 자꾸 잃어버리는 꿈을 꾸다가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스마트폰도 없는데 똥은 마려운 거라. 그래서 변기 위에 앉아 ‘화장실 비치용’ 시집을 꺼냈지. 오늘은 김개미 시인의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였어. 전에 화장실에 있던 시집은 박연준 시인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였는데 언제 바꿔놨는지 몰라. 아무튼 나는 이 시집에서 좋아하던 「사촌」이라는 시를 다시 읽었어. 왜 마을에 하나씩 있던 하루종일 기타나 치고 무위도식하는 흔한 삼촌 이야기야. 아, 삼촌이 아니라 사촌이구나. 자, 들어봐.

 

사촌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학교 운동장만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거야. 물고기 같은 댄서들이 조명을 끊어내며 춤을 추겠지.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여자 대신 기타와 사랑에 빠졌지. 배신이나 하는 여자보다는 온몸으로 우는 기타 가 좋아. 하모니카도 여자보다 낫다는 걸 알아둬. 차갑긴 해도 외면하지는 않지.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그러니 개울에 나와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만 하는 오빨 이상하게 보지 마라.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고 평생 노래만 부르다 영화처럼 죽을 거야. 폐병쟁이같이 창백한 얼굴도 꼬챙이에 찔린 듯한 눈빛도 빨대같이 가느다란 손가락도 베짱이처럼 게으른 천성도 오빠한텐 꼭 필요한 거란다. 하루종일 시냇물이나 들여다보고 휘파람이나 분다고 오빠가 논다고 생각하니? 오빠한텐 저주받은 예술가의 피가 흘러. 오빠 가수가 될 거란다. 오빤 잘 때도 노래를 부른단다. 꿈에서조차 목이 터지지. 오빤 가수 가 될 거란다. 앞으로 영원히 방학만 계속된다 해도 레코드 가게 하나 없는 이 촌구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김개미 시인은 동시를 쓰면서 이름을 이렇게 바꾸었대. 김산옥이라는 본명보다 이 이름이 훨씬 낫지? 어렸을 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래. 김개미 시인은 동시도 참 잘 써. 그가 쓴 「어이없는 놈」이란 시는 얼마나 맹랑하고 웃기는데. 자, 들어봐.


어이없는 놈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오늘 아침 귀엽다고 말해 줬더니

자기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자기는 아주 멋지다는 거야   

   

키가 많이 컸다고 말해 줬더니

자기는 많이 크지 않았다는 거야

자기는 원래부터 컸다는 거야


말이 많이 늘었다고 말해 줬더니

지금은 별로라는 거야

옛날엔 더 잘했다는 거야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자전거 가르쳐 줄까 물어봤더니

자기는 필요 없다는 거야

자기는 세발자전거를

나보다 더 잘 탄다는 거야  

  

사실 나는 김개미 시인의 다른 동시 「삼촌 이야기」를 제일 좋아하는데(아주 짧은 시야) 그건 안 가르쳐 주겠어. 한 번 인터넷으로 찾아봐. 아, 그리고 시집 제목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는 「너보다 조금 먼저 일어나 앉아」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야. 이 시 말고도 다른 좋은 시가 많으니까 궁금하면 시집을 한 번 사보도록 해. 만 원밖에 안 해. 아, 헌책방에서 사지는 마. 그럼 시인한테 인세가 안 돌아가니까. 헌책방에서는 외국 소설을 사는 게 제일 좋아. 외국애들이 뭘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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