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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19. 2023

89세에도 실험극을 만드는 남자라니!

연극 《혁명의 춤》

 

‘혁명의 춤’이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는 춤과 연극이 섞인 공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불이 꺼진 무대 위로 등장한 배우들은 플래시를 껐다 켰다 하면서 뭔가를 찾거나 살피느라 긴박하게 움직일 뿐 춤을 추진 않았다.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혁명이 전조와 진행은 총소리, 파도소리,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소리 등의 음향과 “기다려” “여기” “이쪽이야” “뭐지?” “그들 거야!” 등 짧은 대사를 내뱉는 배우들의 진지한 표정과 몸짓으로 미루어 짐작될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용은 짐작도 못해 답답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보면 아주 흥미롭다. 이 연극의 연출을 맡은 김우옥은 무려 89세다. 그런데도 이렇게 젊고 실험적인 연극을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1980년 미국 뉴욕대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교수와 동랑레퍼터리극단 대표를 거쳐 1993∼200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구조주의 연극의 대가 마이클 커비 밑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실험극을 배웠고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러닝타임 70분의 이 연극은 불이 꺼졌다 켜질 때마다 배우들의 동작이 달라진다. 그래서 연속적으로 불이 꺼졌다 켜질 때는 흡사 스틸 사진을 수십 장 붙여놓은 예고편처럼 보인다. 혁명을 준비할 때는 레지스땅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혁명 당일엔 도로 차단기와 자전거 등을 바리케이드로 쓰는 군중의 모습이 표현되기도 한다. 소품을 던지고 받는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죽은 남자가 누워있고 그 시체 모양 그대로 테이프를 붙여 바디 라인을 만드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무대 양쪽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 너머 반대편 관객들을 구경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흥미로운 연극을 앞에 두고 계속 잠을 자던 내 옆의 청년은 도저히 이해 불가다. 졸리면 집에 가서 자던가.


연극이 끝나고 레지스땅스들이 벽에 붙인 포스터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왔더니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한 여자가 와서 아는 체를 하길래 누구냐고 물었더니 김광덕 배우였다. 그렇게 모자에 마스크를 하고 아는 체를 하면 어떻게 알아보냐고 아내가 웃으며 화를 내고 있는데 요란하게 멋진 치마를 입은 여성이 웃으며 다가왔다. 이번 작품의 조연출을 맡은 오미영 작가였다. 오 작가는 이번에 조연출뿐 아니라 음향 오퍼레이터까지 맡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음향이 중요한 작품이라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아내는 “배우 중에 잘 생긴 남자가 있더구먼. 역시 잘 생긴 건 중요해.”라며 다소 작품성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를 했다. 극장 밖으로 나오니 우리 옆으로 아까 자던 청년이 지나갔다. 집에 가서 잘 모양이군, 이라고 나도 작품과는 별 관계없는 생각을 했다.


나는 못 보고 아내만 봤던 연극 《겹괴기담》도 김우옥 연출의 작품이었는데 작년 한국연극평론가협회의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되는 등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번 ‘혁명의 춤’도 그런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이다.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에서 8월 27일 일요일까지 상연한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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