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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26. 2023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여성 연대는 빛난다

영화 《그녀의 취미생활》리뷰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을 읽고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폭력은 일방적이고 여성들에게 특히 불리하면서 동시에 그 양상이 매우 진부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폭력을 당한 여성들에게 왜 가해자를 진즉에 떠나지 않았느냐고, 왜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비난부터 한다. 모르면 속편하다.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고 논리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하고 시골로 도망치듯 내려온 정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그녀의 취미생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할머니가 사는 평화로운 시골로 내려왔지만 거기에도 평화는 없다. 동네 아줌마들은 만나기만 하면 다시 남편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고 열여섯 살 때 사과밭에서 정인을 성폭행했던 아저씨는 한밤중에 찾아와 창문을 왜 잠그고 자냐며 화를 낸다. 급기야 이혼한 남편이 정인의 돈 이야기를 듣고 시골로 내려와 린치를 가한다. 그때 정인의 옆집으로 신비한 여인 혜정이 이사를 온다. 두 번이나 결혼을 했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죽었다고 밝히는 혜정은 부유한 여자인 데다 ‘취미 부자’다. 혜정과 친해지면서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뜨게 되는 정인은 끈적끈적하게 굴던 중국집 배달부의 목걸이를 혜정의 차 뒤트렁크에서 발견하면서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되는데.......


정이서 배우가 누구던가. 《헤어질 결심》에서 아침에 출근하는 박해일에게 두 손가락을 머리에 세우며 타 부서 상관이 방에서 기다라고 있음을 알리던 그 여형사 아닌가.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들에게 피자 포장 아르바이트를 맡기며 “일을 이렇게 하시면 곤란하죠.”라고 힐난하던 피자집 젊은 여사장 아닌가. 심약해 보이기만 하던 정이서는 병원 문병 씬부터 달라진 정인의 면모를 폭발적으로 연기한다. 어떻게 그동안 이런 연기력을 숨기고 살았나 신기할 정도다.

김혜나 배우는 스무 살 시절 전설의 아트 시네마 《꽃섬》에 출연한 이후로 다양한 영화와 연극에서 활동하던 중견 배우다. 이번 혜정 역은 그동안 쌓은 공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고도 남는 마스터피스다. 다만 혜정은 모든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는 능력이 있고 총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등 사람이라기보다는 천사나 요정에 가까운 인물인데 캐릭터 구축에 좀 애매한 면이 있다. 정인의 남편과 동네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은 판타지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부분이 혜정의 캐릭터와 맞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이 영화는 여성이라는 ‘약자’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여성 연대’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안에서는 정인과 혜정의 믿음직스러운 공감과 연대가 그러하듯 영화 밖에서는 감독과 배우, 스태프 등 조명감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제작 인원이 여성이었다는 점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 아마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제작비로 이런 완성도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명미 감독은 이 영화가 데뷔작이지만 이미 여러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한 바 있다. 나는 원작자인 서미애 작가의 팬이기도 한데 그래서 더더욱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관왕에 빛나는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많이 가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름 블록버스터들이 2,000개 이상의 영화관을 독점할 때 200개 극장으로 시작하는 이 가냘픈 영화를 주목하시라. 2023년 8월 30일 개봉한다. 나는 오늘 CGV압구정에서 유료 시사회로 보았다. 9월엔 다들 극장으로 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자들이 판을 뒤집는 짜릿한 모습을 목격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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