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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27. 2019

뛰어난 극본을 따라가지 못한 연출

연극  <콘센트-동의>


'콘센트'가 무슨 단어인지 몰라 찾아보니 동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국립극단에서 나눠준 리플릿을 보니 이 연극 <콘센트-동의>에는 왠지 섹스가 숨어 있을 것 같아서 예문까지 찾아보았더니 'age of consent'라는 관용어구는 성관계 승낙 연령을 뜻하는 말, 다시 말해 합법적으로 성관계를 승낙할 수 있는 연령을 뜻하는 명사였다. 그렇다면 이건 섹스에 관한 얘기다, 라고 감을 잡은 나는 남다른 기대를 가지고 이 연극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아기를 출산한 키티와 에드에게 레이첼 제이크 커플이 찾아왔다. 그들은 법조계에서 일하는 여피족들인데 친구의 아기를 안고 얼레는 순간에도 서로의 성기나 잠자리 얘기를 하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다. 그들은 무슨 얘기 끝에 여동생의 장례식날 오빠 친구에게 강간을 당한 소녀 사건을 이야기한다. 이어 강간당했다고 주장한 소녀가 등장해 검찰 측 변호사인 팀과 문답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고 보면 이 팀이라는 독신 남자도 에드, 제이크 커플과 친구 사이다. 그 사이에 자라라는 여배우도 하나 끼어든다.


이 연극의 극본을 쓴 니나 레인은 영국에서 잘 나가는 극작가 겸 연출가라고 하는데 재작년 초연한 이래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고 작년에 해롤드 핀터 극장에서 재연한 뒤 우리나라가 라이선스를 들여왔다고 한다. 극본은 힘이 넘친다. 자신감이 넘쳐 뻔뻔하고 짓궂기까지 한 여피족들은 "섹스가 이유가 아닌 게 존재해? 이 세상에 섹스가 이유 아닌 거 있으면 하나만 대봐."라고 할 정도로 찰랑찰랑한 경계를 걸으며 방만한 태도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뭐든 차면 넘치는 법. 어느 날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에드가 집에서 쫓겨나더니 나중엔 남편에게 아픔을 주기 위해 팀과 바람을 피우다가 사랑에 빠진 레이첼과 제이크도 헤어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부부 강간'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들이 법정에서 다루었던 강간 문제는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어쩌다 보니 세련된 여피들에게도 강간이라는 단어가 생활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섹스나 바람으로 시작된 사건들이 서로의 사과나 용서로 끝나 자존심을 회복하기를 바라지만 늘 그렇듯 삶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점잖고 세련된 면모를 보여주던 여피들은 마지막엔 키티의 낙태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결국 이전투구에 돌입하고 바람을 피웠냐 아니냐, 강간이었냐 아니냐  등의 설전으로 190분의 장렬한 전투를 벌인다. 극본이 흥미롭고 탄탄하지 않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멋진 극본에 비해 연출의 힘은 달리는 느낌이다. 배우들의 대사 사이사이 마가 뜨고 진행도 느려서 답답해진다. 그리고 여피족 역을 맡기엔 몇몇 배우들의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인다. 안타까운 지점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누구나 삶의 균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며 모두의 일상을 바꾸어 버린다. 니나 레인은 현대 도시인들의 허위의식과 고독을 관계와 직업과 섹스라는 소재를 통해 재치 있게 드러낸다. 영국에서 이 연극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것은 이런 근본적이면서도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공연을 시작하지 얼마 안 돼서 부족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극장은 만원이었고 관객들은 연극이 끝난 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진이 쪽 빠질 정도로 열연을 펼친 연기자들은 멋졌다. 명동예술극장에서  7월 7일까지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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